"자연 닮은 대금 소리 선사…전통예술 가치 빛낼 것"
[남도예술인]대금 명인 원장현
숙부 원광호 명인 권유로 15세 대금 입문해 ‘한길’
36세에 ‘원장현류 대금산조’ 발표 국악 안팎 주목
담양 전수관 건립 계획…51주년 공연·음반 발매
숙부 원광호 명인 권유로 15세 대금 입문해 ‘한길’
36세에 ‘원장현류 대금산조’ 발표 국악 안팎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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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 09. 20(수)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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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현 대금 명인.
담양, 대나무, 그리고 국악.
그의 유년시절은 이 세 단어로 축약된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서 태어났고, 집안 어르신들의 국악 연주 소리를 들으며 컸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리 야무지기로 소문난 대금 연주자였고, 그의 숙부는 훗날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로 이름을 올린 원광호 명인이었다.
국악의 품에서 자랐으니, 그도 자연스레 대금을 불기 시작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대금을 연주했다. ‘그저 좋아서’ 대금을 불었던 소년의 무른 입술에 이제는 딱딱한 굳은살 한 점이 얹어졌다. 국악 소년에서 국내 최고의 대금연주자로 성장하면서 얻은 빛나는 훈장일 터.
올해 국악인생 51주년을 맞은 원장현 대금산조 명인의 이야기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숙부 원광호 명인의 권유로 대금에 입문했다. 이후, 대금에 빠져 살았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만 좀 불어라” 만류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하니, 그의 대금 사랑이 얼마나 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금을 사랑한 소년 곁에는 빼어난 스승들도 넘쳤다. 첫 스승인 대금 거목 김용기, 민간풍류와 민간악보를 알려준 오진석, 산조의 기본을 가르쳐준 김동진 등이 그들이다. 지금의 원 명인이 있기까지 큰 은혜를 준 분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일섭 선생은 그의 예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다.
한일섭 선생은 소년 명창과 명고수로 널리 알려진 국악계 귀재다. 한 선생은 아쟁 산조 창시자이자 태평소 시나위 권위자였지만, 대금 연주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스승인 대금 산조 창시자 박종기 선생의 연주를 가까이서 들어온 터라, 대금 가락을 듣는 귀는 누구보다 트여 있었다. 그런 한 선생은 원 명인의 대금 산조 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반응해 주었다. 원 명인은 ‘원장현류 대금 산조’의 완성은 한일섭 선생 가르침 덕으로 꼽는다.
귀한 스승들을 여럿 둔 원 명인은 그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특히 그는 국악계에 반향을 일으키는 기록들을 여러 번 세웠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982년 제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문 최연소 장원 수상자란 타이틀이다. 원 명인 서른세 살 때 일이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원장현류 대금 산조’를 세상에 내놓았다.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자기 유파를 발표하는 것은 국악계 큰 파장을 일으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자기 유파를 발표하는 경우는 원로이거나 사후에 행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당시 국립국악원장이 ‘원장현’ 만의 가락이 나왔으니 이름을 건 유파를 발표하라고 권유했어요. 젊은 패기에다 용기까지 더해져서 나온 결과물이 ‘원장현류 대금산조’였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속된 말로 ‘어린놈이 건방지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의 도전을 치켜세워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원장현류’가 서울대학교 과목으로 채택, 이를 배우는 학생들, 가르치는 국악인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파로 인정됐다.
그의 대금소리는 자연을 닮은 소리이자 남도의 정서가 듬뿍 배인 소리로 평가받는다. ‘원장현류 대금산조’는 자연스러우면서 꿋꿋한 힘이 넘쳐 질서가 있고, 조화로운 맛이 있는 동시에 강렬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평이다. 자연에서 얻은 국악기로, 자연을 닮은 소리를 낸다니 이보다 더 한 찬사가 있을까.
지난 세월 수도 없이 많은 공연을 올린 그이지만, 여전히 무대는 그의 심장을 두드린다.
소리 인생 51주년을 맞은 그에게 무대는 여전히 가슴 뛰는 공간이다. 그간 100개국을 넘나들며 우리 소리 전도사 역할을 한 것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해외 공연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의 공연은 감명 깊었던 무대다.
“1993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할 때 1540석이 정원인데 객석에 860명이 초과된 2400명이 입장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제1회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인도음악과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는데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20여 개국 대사가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3개 지상파 TV 밤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또 2002년 월드컵 전야제때 100개국 생방송 무대에서의 대금연주, 그해 10월24일 UN의 날 기념 특별공연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뉴욕 UN본부 본회의장에서 한 대금독주회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코피아난 사무총장을 비롯해 192개 회원국 대표와 우리 교민들로 공연장은 만석을 이뤘었다. 그리고 2003년 뉴욕 카네기홀 대극장에서의 뉴욕재즈오케스트라와 협연했던 무대 등은 그는 물론 한국 대금 역사에도 길이 기억될 빛나는 업적이다.
그가 이처럼 대금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길을 걷고 있는 가족들 덕도 크다. 그의 평생 동반자인 조경주씨는 해금과 무용을 전공했고, 금현국악원(琴絃國樂院)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 또한 부모님의 길을 따른다.
“아들(완철)은 대금과 소금 그리고 태평소를 전공했어요. 현재 국립 국악원 민속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죠. 해금을 전공한 딸(나경)은 그룹 ‘바라지’라는 연주단체 소속으로 국내외를 누비며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고요. 며느리 또한 가야금을 전공해, 후학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국악인이죠.”
선대에서부터 후대까지. 뼛속에서부터 국악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야말로 ‘국악 가족’이다.


원장현 대금 명인은 이제 고향이 더 그리운 나이가 됐다. 국내외를 누비며 대금 선율을 선사해왔지만, 이제는 고향인 담양에서도 ‘새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의 소리를 잇는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대금 산조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담양에 마련하는 게 원 명인의 남은 과제이자 숙원이다.
“끊임없는 후진양성은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갈고 닦은 예술을 남김없이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죠.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면 제 고향 담양에 소리를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는 ‘원장현류 대금산조 전수관’을 건립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탯자리는 담양 월산면이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담양 읍내에다 전수관을 낼 생각이다. 대나무 고장을 찾은 많은 방문객들이 전수관에 오면, ‘단소’라도 배워가게끔 하고 싶은 그다. 일상 속에서 전통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만 그 가치가 오래도록 빛날 수 있음을 믿기 때문.
평생 국악과 함께 해 온 사람으로서 ‘전통국악’이 흥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할 터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자신의 역할을 되뇌어 보는 그다.
“대금을 연주하면서 얻는 가장 큰 기쁨은 ‘자연에서 얻은 소리’라는 점이었습니다. 국악의 많은 악기 중 자연 그대로 제작된 악기는 흔치 않거든요. 대금을 연주하고 있으면 제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평안했어요. 대금을 끼고 살면서 행복했던 만큼, 그 기쁨을 나누면서 살고 싶어요.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오직 청아한 대나무 소리를 좇아 정진하겠습니다.“
원장현 명인은 국악인생 51주년 공연과 ‘원장현류 대금산조 학술세미나’를 오는 10월29일 국립극장에서 열 예정이며, 50주년 기념 음반출반 악보집 발간 등 다채로운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의 유년시절은 이 세 단어로 축약된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서 태어났고, 집안 어르신들의 국악 연주 소리를 들으며 컸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리 야무지기로 소문난 대금 연주자였고, 그의 숙부는 훗날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로 이름을 올린 원광호 명인이었다.
국악의 품에서 자랐으니, 그도 자연스레 대금을 불기 시작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대금을 연주했다. ‘그저 좋아서’ 대금을 불었던 소년의 무른 입술에 이제는 딱딱한 굳은살 한 점이 얹어졌다. 국악 소년에서 국내 최고의 대금연주자로 성장하면서 얻은 빛나는 훈장일 터.
올해 국악인생 51주년을 맞은 원장현 대금산조 명인의 이야기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숙부 원광호 명인의 권유로 대금에 입문했다. 이후, 대금에 빠져 살았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만 좀 불어라” 만류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하니, 그의 대금 사랑이 얼마나 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금을 사랑한 소년 곁에는 빼어난 스승들도 넘쳤다. 첫 스승인 대금 거목 김용기, 민간풍류와 민간악보를 알려준 오진석, 산조의 기본을 가르쳐준 김동진 등이 그들이다. 지금의 원 명인이 있기까지 큰 은혜를 준 분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일섭 선생은 그의 예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다.
한일섭 선생은 소년 명창과 명고수로 널리 알려진 국악계 귀재다. 한 선생은 아쟁 산조 창시자이자 태평소 시나위 권위자였지만, 대금 연주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스승인 대금 산조 창시자 박종기 선생의 연주를 가까이서 들어온 터라, 대금 가락을 듣는 귀는 누구보다 트여 있었다. 그런 한 선생은 원 명인의 대금 산조 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반응해 주었다. 원 명인은 ‘원장현류 대금 산조’의 완성은 한일섭 선생 가르침 덕으로 꼽는다.
귀한 스승들을 여럿 둔 원 명인은 그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특히 그는 국악계에 반향을 일으키는 기록들을 여러 번 세웠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982년 제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문 최연소 장원 수상자란 타이틀이다. 원 명인 서른세 살 때 일이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원장현류 대금 산조’를 세상에 내놓았다.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자기 유파를 발표하는 것은 국악계 큰 파장을 일으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자기 유파를 발표하는 경우는 원로이거나 사후에 행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당시 국립국악원장이 ‘원장현’ 만의 가락이 나왔으니 이름을 건 유파를 발표하라고 권유했어요. 젊은 패기에다 용기까지 더해져서 나온 결과물이 ‘원장현류 대금산조’였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속된 말로 ‘어린놈이 건방지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의 도전을 치켜세워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원장현류’가 서울대학교 과목으로 채택, 이를 배우는 학생들, 가르치는 국악인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파로 인정됐다.
그의 대금소리는 자연을 닮은 소리이자 남도의 정서가 듬뿍 배인 소리로 평가받는다. ‘원장현류 대금산조’는 자연스러우면서 꿋꿋한 힘이 넘쳐 질서가 있고, 조화로운 맛이 있는 동시에 강렬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평이다. 자연에서 얻은 국악기로, 자연을 닮은 소리를 낸다니 이보다 더 한 찬사가 있을까.
지난 세월 수도 없이 많은 공연을 올린 그이지만, 여전히 무대는 그의 심장을 두드린다.

“1993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할 때 1540석이 정원인데 객석에 860명이 초과된 2400명이 입장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제1회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인도음악과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는데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20여 개국 대사가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3개 지상파 TV 밤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또 2002년 월드컵 전야제때 100개국 생방송 무대에서의 대금연주, 그해 10월24일 UN의 날 기념 특별공연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뉴욕 UN본부 본회의장에서 한 대금독주회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코피아난 사무총장을 비롯해 192개 회원국 대표와 우리 교민들로 공연장은 만석을 이뤘었다. 그리고 2003년 뉴욕 카네기홀 대극장에서의 뉴욕재즈오케스트라와 협연했던 무대 등은 그는 물론 한국 대금 역사에도 길이 기억될 빛나는 업적이다.
그가 이처럼 대금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길을 걷고 있는 가족들 덕도 크다. 그의 평생 동반자인 조경주씨는 해금과 무용을 전공했고, 금현국악원(琴絃國樂院)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 또한 부모님의 길을 따른다.
“아들(완철)은 대금과 소금 그리고 태평소를 전공했어요. 현재 국립 국악원 민속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죠. 해금을 전공한 딸(나경)은 그룹 ‘바라지’라는 연주단체 소속으로 국내외를 누비며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고요. 며느리 또한 가야금을 전공해, 후학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국악인이죠.”
선대에서부터 후대까지. 뼛속에서부터 국악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야말로 ‘국악 가족’이다.


원장현 대금 명인은 이제 고향이 더 그리운 나이가 됐다. 국내외를 누비며 대금 선율을 선사해왔지만, 이제는 고향인 담양에서도 ‘새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의 소리를 잇는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대금 산조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담양에 마련하는 게 원 명인의 남은 과제이자 숙원이다.
“끊임없는 후진양성은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갈고 닦은 예술을 남김없이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죠.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면 제 고향 담양에 소리를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는 ‘원장현류 대금산조 전수관’을 건립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탯자리는 담양 월산면이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담양 읍내에다 전수관을 낼 생각이다. 대나무 고장을 찾은 많은 방문객들이 전수관에 오면, ‘단소’라도 배워가게끔 하고 싶은 그다. 일상 속에서 전통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만 그 가치가 오래도록 빛날 수 있음을 믿기 때문.
평생 국악과 함께 해 온 사람으로서 ‘전통국악’이 흥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할 터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자신의 역할을 되뇌어 보는 그다.
“대금을 연주하면서 얻는 가장 큰 기쁨은 ‘자연에서 얻은 소리’라는 점이었습니다. 국악의 많은 악기 중 자연 그대로 제작된 악기는 흔치 않거든요. 대금을 연주하고 있으면 제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평안했어요. 대금을 끼고 살면서 행복했던 만큼, 그 기쁨을 나누면서 살고 싶어요.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오직 청아한 대나무 소리를 좇아 정진하겠습니다.“
원장현 명인은 국악인생 51주년 공연과 ‘원장현류 대금산조 학술세미나’를 오는 10월29일 국립극장에서 열 예정이며, 50주년 기념 음반출반 악보집 발간 등 다채로운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