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얏고 12현…40여년 생(生)을 담다"
[사람사는 이야기] 이춘봉 광주무형문화재 제12호 기능보유자
73년 인당국악사 개점…고대 악기 복원 등
전통 악기 제작 기법·현대 기술 접목 시도
오동나무 깎는 목공기계 등 특허 3개 보유
73년 인당국악사 개점…고대 악기 복원 등
전통 악기 제작 기법·현대 기술 접목 시도
오동나무 깎는 목공기계 등 특허 3개 보유
입력 : 2016. 12. 01(목) 18:07

이춘봉 악기장은 “2000년의 시간을 뚫고 온 악기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보존·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인당’이 새겨진 악기들이 세계 곳곳에서 한국 소리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음은 큰 행운이다. 그 업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복 있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40여년 가야금에 포옥 파묻혀 살아온 이춘봉 장인(68·광주무형문화재 제12호 기능보유자)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겠다.
이춘봉 명인은 전통 악기를 만드는 장인, 악기장이다. 악기장은 전통악기의 주재료인 나무와 가죽, 명주실, 대나무, 쇠, 돌, 흙 등을 이용해 악기를 만들어 내는 명인을 말한다. 각 악기가 지닌 특유의 소리를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기능인이란 점에서 일반 공예장인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이 명인은 애초 전통 가야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휘익-’ 휘파람 한 번 쉬이 못 뱉는 엄한 집안이었고, 장성해서는 큰 형님의 사업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던 그의 나이 25세, 우연히 가야금 선율이 그의 귀에 꽂혔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음색이 단박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야금 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내 기분이 좋을 때 들으면 이보다 더 행복한 소리가 없고, 슬플 때 들으면 또 너무나 구슬프고요. 내 마음을 읽어주고 또 위로해주는 것, 가야금 선율이 주는 감동이었어요.”
이후, 가야금을 향한 그의 외사랑은 시작됐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이면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 좋아서 연주하다가, 또 너무나 좋은 나머지 직접 가야금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돌이켜 보면 제 삶의 면면이 모두 가야금과 연이 닿아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연주활동을 했고, 이후 형의 사업을 도와 대리석공장을 운영했죠. 차가운 대리석과 가야금이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당시 돌을 자르고 구멍을 내고 하는 기술들이 후에 가야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전주 출신인 그는 1971년 서울 출신의 악기 기능공을 데려와 첫 국악기 제작소 문을 열었다. 광주로 넘어오게 된 계기는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운 당시 광주시립국악원 김금향 선생의 영향이 크다. 김금향 선생과 맺은 연은 스승과 교류하던 김광주 선생으로 이어진다. 이 악기장은 김광주 선생에게 악기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고 본격적으로 가야금 제작에 나선다.
1973년 ‘인당국악사’ 문을 연 그는 야외에 대형 전통악기 작업장을 만들어 전통 악기 제작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 당시 그는 품귀상태에 있었던 오동나무 원목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고, 특수 제재한 원자재를 전국의 악기 제작자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가야금 제작에 뛰어든 그는 지난 1978년 제3회 무형문화재 전승공예대전에서 가야금·거문고 부문 특별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1995년 광주무형문화재 제12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고, 이후 2005년 광주 신창동 고대악기 복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결과물은 경북 고령 우륵박물관과 서울 국립국악원 박물관 전시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고대 악기의 원리와 현대 과학을 접목시킨 전통현악기 제작에 골몰했다. 그 결과 가야금을 만들 때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되 자신의 전공인 전자 분야의 현대적 기술과 결합, 그만의 제작법이 탄생했다.
현재 그는 가야금·거문고·아쟁을 비롯해 해금·북·단소·태평소 등을 제작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야금 제작과 관련한 특허만 세 개를 가졌다.
특히 오동나무 상판을 깎아 울림통을 뽑아내는 목공기계는 가야금 대중화에도 기여한 것으로 손꼽힌다. 본래 가야금은 상판으로 사용하는 오동나무를 오목하게 파내어 만들었다. 통 나무를 깎아내니, 잘려나가는 부분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제작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 악기장은 계속된 연구 끝에 상판과 뒷 판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닌, 오동나무 울림통을 통째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한 기술을 개발했다. 나무를 깨고, 붙이는 과정이 없이 오로지 하나의 울림통을 가지니 더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또 세월이 흘러도 이음새 부분이 뒤틀림이 없으니, 그 소리가 백년간 영원하다 하여 ‘백년금’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가야금에는 또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지시등’이다. 지시등은 12개 현 중 어느 현에서 소리를 내는 지 알 수 있도록 불이 켜진다. 악기를 조율할 때 수월하다.
“특허 기술로 가야금을 만드는 데 시간도, 노력도 모두 절감됐어요. 특히 귀한 오동나무를 아낄 수 있었죠. 가야금 하나 만들 것을, 두 개 세 개까지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 소리까지 가벼워 진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가야금의 소리를 결정짓는 본 재료를 엄선하기 때문이죠.”

이 악기장은 오동나무를 고를 때 엄격하다. 오동나무 중에서도 눈가 비바람을 호되게 맞은 것이야말로 최고 재료로 친다. 비에 젖고 볕에 마르고 이를 반복하면서 나무가 ‘맛있게’ 숙성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토질이 좋은 땅에서 자란 나무는 물러요. 좋은 소리가 나질 않죠.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생을 이어간 나무는 강하고 단단해요. 단단한 것은 나무를 쪼개기도 어렵고, 숙성시키는 데도 품이 많이 들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그 소리가 영원해요.”
가야금 줄도 명주실만을 사용한다. 현의 굵기에 맞춰 30~80여 가닥을 일일이 손으로 꼰다. 이를 소나무 방망이에 감아 찌는 과정을 거쳐 실에 탄력을 준다. 이 같은 작업 중 한 부분만 어긋나도 소리가 달라진다. 때문에 제작된 가야금에 맞춰 그때그때 소리를 가늠해 가면서 합사한 줄만을 고집, 명주실이라고 해서 따로 규격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질긴 면에서는 낚싯줄이 제격이지만 명주실 소리를 따라올 수가 없어요. 가야금 줄을 튕기면 ‘원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는데, 낚싯줄은 질기기만해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나거든요.”
또 그는 재래의 숯불 인두에 비해 온도조절이 쉬운 전기인두와 오동나무 본체를 매끈히 깎는 대패도 직접 고안해 쓴다. 그의 이 같은 고집은 가야금 특유의 농현을 내는 데 빛을 발한다.
“가야금·거문고 등 전통 현악기의 특징은 원래 음 이외 여러 가지 장식음을 내는 것이죠.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보면 돼요. 일본·중국 등 현악기와 연주방법은 비슷할지라도, 농현이 표현되는 것은 우리 악기가 유일해요.”
이 악기장의 손을 거친 악기들은 그의 호 ‘인당’이 새겨진다. 소위 불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악기 하나 하나에 각을 직접 새기는 그다. 바로 최고의 악기를 만든다는 명인의 자존심이다.
이 명인은 이 같은 그의 악기가 단 한명의 청중에게라도 진한 감동을 주길 바란다. 젊은 시절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전통 가야금 선율에 홀딱 반한 것처럼 전통 악기의 아름다움이 널리 퍼지길 그는 기대한다.
“2000년의 시간을 뚫고 온 악기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보존·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지난 세월 전통기법의 악기제작을 고수해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죠. ‘인당’이 새겨진 악기들이 세계 곳곳에서 한국 소리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악기장 이춘봉은
△1947년 전추 출생 △1971년 악기제작 입문 △1972~1974년 성금현류 가야금 산조 이수·한갑득류 거문고 산조 이수 △1978년 제3회 인간문화재 작품전승공예대전 가야금 거문고 부분 특별우수상 △1995년 무형문화재 악기장 지정 △2005년 광주 신창동 고대악기 복원 및 시현·경북 고령 우륵박물관 서울 국립국악원 박물관 전시△2010년 부천 무형문화엑스포 전시△2011년 고대악기의 원리와 현대과학을 겸비한 전통현악기 제작 완료, 시현 △2011년 제1회 서암문화재단 대상 △2012년 고려 공민왕 무용총벽화에 거문고 복원(국립국악박물관 전시)
이춘봉 명인은 전통 악기를 만드는 장인, 악기장이다. 악기장은 전통악기의 주재료인 나무와 가죽, 명주실, 대나무, 쇠, 돌, 흙 등을 이용해 악기를 만들어 내는 명인을 말한다. 각 악기가 지닌 특유의 소리를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기능인이란 점에서 일반 공예장인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이 명인은 애초 전통 가야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휘익-’ 휘파람 한 번 쉬이 못 뱉는 엄한 집안이었고, 장성해서는 큰 형님의 사업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던 그의 나이 25세, 우연히 가야금 선율이 그의 귀에 꽂혔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음색이 단박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야금 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내 기분이 좋을 때 들으면 이보다 더 행복한 소리가 없고, 슬플 때 들으면 또 너무나 구슬프고요. 내 마음을 읽어주고 또 위로해주는 것, 가야금 선율이 주는 감동이었어요.”
이후, 가야금을 향한 그의 외사랑은 시작됐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이면 가야금을 배우러 다녔다. 좋아서 연주하다가, 또 너무나 좋은 나머지 직접 가야금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돌이켜 보면 제 삶의 면면이 모두 가야금과 연이 닿아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연주활동을 했고, 이후 형의 사업을 도와 대리석공장을 운영했죠. 차가운 대리석과 가야금이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당시 돌을 자르고 구멍을 내고 하는 기술들이 후에 가야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전주 출신인 그는 1971년 서울 출신의 악기 기능공을 데려와 첫 국악기 제작소 문을 열었다. 광주로 넘어오게 된 계기는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운 당시 광주시립국악원 김금향 선생의 영향이 크다. 김금향 선생과 맺은 연은 스승과 교류하던 김광주 선생으로 이어진다. 이 악기장은 김광주 선생에게 악기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고 본격적으로 가야금 제작에 나선다.
1973년 ‘인당국악사’ 문을 연 그는 야외에 대형 전통악기 작업장을 만들어 전통 악기 제작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 당시 그는 품귀상태에 있었던 오동나무 원목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고, 특수 제재한 원자재를 전국의 악기 제작자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가야금 제작에 뛰어든 그는 지난 1978년 제3회 무형문화재 전승공예대전에서 가야금·거문고 부문 특별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1995년 광주무형문화재 제12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고, 이후 2005년 광주 신창동 고대악기 복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결과물은 경북 고령 우륵박물관과 서울 국립국악원 박물관 전시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고대 악기의 원리와 현대 과학을 접목시킨 전통현악기 제작에 골몰했다. 그 결과 가야금을 만들 때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되 자신의 전공인 전자 분야의 현대적 기술과 결합, 그만의 제작법이 탄생했다.
현재 그는 가야금·거문고·아쟁을 비롯해 해금·북·단소·태평소 등을 제작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야금 제작과 관련한 특허만 세 개를 가졌다.
특히 오동나무 상판을 깎아 울림통을 뽑아내는 목공기계는 가야금 대중화에도 기여한 것으로 손꼽힌다. 본래 가야금은 상판으로 사용하는 오동나무를 오목하게 파내어 만들었다. 통 나무를 깎아내니, 잘려나가는 부분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제작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 악기장은 계속된 연구 끝에 상판과 뒷 판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닌, 오동나무 울림통을 통째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한 기술을 개발했다. 나무를 깨고, 붙이는 과정이 없이 오로지 하나의 울림통을 가지니 더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또 세월이 흘러도 이음새 부분이 뒤틀림이 없으니, 그 소리가 백년간 영원하다 하여 ‘백년금’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가야금에는 또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지시등’이다. 지시등은 12개 현 중 어느 현에서 소리를 내는 지 알 수 있도록 불이 켜진다. 악기를 조율할 때 수월하다.
“특허 기술로 가야금을 만드는 데 시간도, 노력도 모두 절감됐어요. 특히 귀한 오동나무를 아낄 수 있었죠. 가야금 하나 만들 것을, 두 개 세 개까지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 소리까지 가벼워 진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가야금의 소리를 결정짓는 본 재료를 엄선하기 때문이죠.”

눈과 비바람을 호되게 맞은 오동나무를 최고 재료로 꼽는 이춘봉 악기장이 가야금 제작에 실혐을 기울이고 있다.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이 악기장은 오동나무를 고를 때 엄격하다. 오동나무 중에서도 눈가 비바람을 호되게 맞은 것이야말로 최고 재료로 친다. 비에 젖고 볕에 마르고 이를 반복하면서 나무가 ‘맛있게’ 숙성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토질이 좋은 땅에서 자란 나무는 물러요. 좋은 소리가 나질 않죠.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생을 이어간 나무는 강하고 단단해요. 단단한 것은 나무를 쪼개기도 어렵고, 숙성시키는 데도 품이 많이 들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그 소리가 영원해요.”
가야금 줄도 명주실만을 사용한다. 현의 굵기에 맞춰 30~80여 가닥을 일일이 손으로 꼰다. 이를 소나무 방망이에 감아 찌는 과정을 거쳐 실에 탄력을 준다. 이 같은 작업 중 한 부분만 어긋나도 소리가 달라진다. 때문에 제작된 가야금에 맞춰 그때그때 소리를 가늠해 가면서 합사한 줄만을 고집, 명주실이라고 해서 따로 규격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질긴 면에서는 낚싯줄이 제격이지만 명주실 소리를 따라올 수가 없어요. 가야금 줄을 튕기면 ‘원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하는데, 낚싯줄은 질기기만해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나거든요.”
또 그는 재래의 숯불 인두에 비해 온도조절이 쉬운 전기인두와 오동나무 본체를 매끈히 깎는 대패도 직접 고안해 쓴다. 그의 이 같은 고집은 가야금 특유의 농현을 내는 데 빛을 발한다.
“가야금·거문고 등 전통 현악기의 특징은 원래 음 이외 여러 가지 장식음을 내는 것이죠.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보면 돼요. 일본·중국 등 현악기와 연주방법은 비슷할지라도, 농현이 표현되는 것은 우리 악기가 유일해요.”
이 악기장의 손을 거친 악기들은 그의 호 ‘인당’이 새겨진다. 소위 불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악기 하나 하나에 각을 직접 새기는 그다. 바로 최고의 악기를 만든다는 명인의 자존심이다.
이 명인은 이 같은 그의 악기가 단 한명의 청중에게라도 진한 감동을 주길 바란다. 젊은 시절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전통 가야금 선율에 홀딱 반한 것처럼 전통 악기의 아름다움이 널리 퍼지길 그는 기대한다.
“2000년의 시간을 뚫고 온 악기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보존·계승해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지난 세월 전통기법의 악기제작을 고수해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죠. ‘인당’이 새겨진 악기들이 세계 곳곳에서 한국 소리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악기장 이춘봉은
△1947년 전추 출생 △1971년 악기제작 입문 △1972~1974년 성금현류 가야금 산조 이수·한갑득류 거문고 산조 이수 △1978년 제3회 인간문화재 작품전승공예대전 가야금 거문고 부분 특별우수상 △1995년 무형문화재 악기장 지정 △2005년 광주 신창동 고대악기 복원 및 시현·경북 고령 우륵박물관 서울 국립국악원 박물관 전시△2010년 부천 무형문화엑스포 전시△2011년 고대악기의 원리와 현대과학을 겸비한 전통현악기 제작 완료, 시현 △2011년 제1회 서암문화재단 대상 △2012년 고려 공민왕 무용총벽화에 거문고 복원(국립국악박물관 전시)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