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세상읽기] 올해의 사자성어. 현실을 관통하다
입력 : 2025. 12. 29(월)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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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주필

#1

연말이 되면 권위 있는 잡지나 사전 편찬기관들이 한해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올해의 단어, 올해의 사자성어 등을 선정해 발표한다.

영국의 유력 시사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슬롭(Slop)’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명사로 ‘음식물 찌꺼기·오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코노미스트는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저질 콘텐츠가 올 한해 너무 많았다는 의미로 가져왔다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출판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영어사전인 옥스퍼드 사전도 매년 이맘때 올해의 단어를 발표하는데 2025년은 ‘레이지 베이트(Rage bait)’를 뽑았다. 직역하면 ‘분노 미끼’라는 뜻인데 온라인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분노와 짜증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콘텐츠가 넘쳐 난 한해라는 의미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것이 선정 배경이라고 한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도 지난 1995년부터 한 해의 일본 사회상을 반영하는 ‘올해의 한자’를 발표하고 있다.

엽서나 인터넷을 통해 접수된 한자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을 1위로 선정하는 데 올해는 ‘곰 웅(熊)’이 선정됐다. 이는 지난 1년 동안 곰이 일본 각지에서 출몰하며 피해가 많이 발생해 사회에 충격을 준 점이 선정 이유라는 분석이다.

2위는 ‘쌀 미’(米)가 차지했는데 미(米)는 쌀값 급등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이 반영된 것으로 일본은 미국을 한자로 ‘米國’으로 표기한다.



#2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2년 창간한 주간지 ‘교수신문’이 한해 동안의 주요 이슈와 사회적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하고 있다 .이 신문의 사자성어는 지난 2001년 ‘아무리 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의미하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을 선정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교육정책의 잦은 변화, 암울한 국제 정세, 계약제와 연봉제 도입에 따른 신분 불안 등 사회 전반에 불확실성이 컸던 시기를 빗댄 표현이었다.

이후 매년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추천, 예비심사, 전화·온라인 설문조사 등 3단계 과정을 거쳐 선정하고 있다.

뽑힌 사자성어들이 대부분 한 해의 시대상을 관통하고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촌철살인’적인 표현들이어서 나름 권위를 인정받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25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변동불거(變動不居)가 선정됐다. 전국 교수 766명 대상 설문에서 33.94%의 지지를 받아 1위로 뽑힌 이 말은 유학의 고전 ‘주역’에서 유래됐으며 ‘변화는 멈추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다시 말해, 12·3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정권 교체 등 1년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던 격동의 우리 사회를 반영했다는 얘기다.

지난해의 사자성어는 ‘권력과 세력을 함부로 부리고 날뛰다’라는 뜻의 ‘도량발호(跳梁跋扈)’였는데 12·3 비상계엄을 상징적으로 지칭했다.



#3

중소기업중앙회도 지난 2014년부터 매년 연말 올해의 경영환경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를 선정하고 있다. 특히 내년도 경영환경을 전망하는 사자성어까지 발표해 눈길을 끈다. 최근 중소기업 1000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 응답자 66.5%의 지지로 1위를 차지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적은 인원이나 약한 힘으로 어려운 상황을 잘 헤쳐나간다’는 뜻의 ‘고군분투(孤軍奮鬪)’였다고 한다.

내년도 사자성어로는 30.2%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한 ‘자강불식(自强不息)’이 뽑혔다.

이는 ‘스스로 강하게 하며 쉬지 않고 노력한다’는 뜻인데 대내외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기업 역량을 강화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중소기업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불·붉은색을 뜻하는 병(丙)과 ‘말’을 의미하는 오(午)가 결합한 것으로 속도, 힘, 진취성을 상징하는 말과 에너지를 상징하는 불이 만났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치 않다. 미국과 중국의 첨단기술 패권전쟁,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 강화, 계속되는 12·3내란 사태 후유증, 장기화되고 있는 등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많은 고비들이 눈앞에 놓여 있다. 격동의 시대인 2026년, 붉은 말의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길 바란다.
김상훈 기자 goart001@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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