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주독립에 바친 생애…‘민족의 등불’로
■계몽·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 선생의 삶과 정신
개화의식 배양 갑신혁명 단행 독립신문·독립협회 활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결성
미국 망명 한국인 최초 의사…독립 지원 외교 추진도
입력 : 2023. 06. 29(목) 18:08
본문 음성 듣기
송재 서재필 선생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암울했던 시대 민족계몽과 자주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살다 간 민족의 지도자. 구한말에서 해방 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꺼져가는 국운에 맞서 근대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꿈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친 이가 있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보내며, 전남 출생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 선생의 삶을 조명했다./편집자주



송재(松齋) 서재필(1864~1951)선생은 한국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시대가 바뀌고 나라가 급진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동안 그는 개화·혁신의 선봉장이자 민중계몽의 선각자로서 꺼지지 않는 불꽃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침탈에 맞서 개화의식을 배양해 갑신정변을 단행했으며, 독립신문·독립협회를 통한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한국친우회 결성을 통한 독립운동, 해방 정국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등을 펼쳤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망명한 후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개척자적 삶을 살았으며, 독립운동으로 인해 사업이 쇠퇴한 이후에는 62세의 나이에 다시 의학을 공부해 만년의 삶을 일구는 등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송재는 1864년 1월7일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서광효의 둘째아들로 출생해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후 자식이 없던 7촌 당숙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충남 대덕에 잠시 살았으며, 7세가 되던 해 공부를 위해 서울에 사는 외숙부인 김성근의 집으로 떠나,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 3등에 급제했다.

송재는 일찍이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해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에 눈을 떴다. 이후 김옥균의 제의를 받은 그는 문관으로서 출셋길을 마다하고 188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도야마(山) 육군군사학교에 입교, 신식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이때의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화만이 조선이 나아갈 길임을 깨달은 그는 급진적인 개화 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84년 12월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국군을 앞세운 수구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정변은 ‘3일 천하’로 끝이 났고, 역적으로 낙인찍힌 그는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 아내와 아들, 부모와 동생 재창이 반역자의 가족으로 몰려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이때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송재는 윌커스 베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과 일본의 의학 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다 의학 공부에 뜻을 품었다. 그리고 콜럼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M.D.)를 획득했다.

그즈음 국내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진통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이 벗겨지자 그는 조국 땅에 선진사상을 심어 발전에 기여하는 뜻을 품고 이듬해 12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추원 고문직을 맡아 민중계몽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계 및 관계 인사들과 외국 사절들, 여타의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면서 자신의 활동 기반을 다지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했다.

배재학당에 나가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협성회를 조직해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지도하며 선진의식을 일깨웠다. 특히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 한국의 정치·사회발전을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았다.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했으며,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열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송재문화제’가 열리는 서재필기념공원 모습
이 같은 개혁·계몽운동은 점차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게 됐고, 일본과 러시아는 배후 인물로 그를 지목하고 추방공작을 전개, 1898년 5월 다시 조국을 떠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송재가 국내에서 시작한 계몽운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사회에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뿌린 것으로 한국 민중의 잠재의식을 일깨운 선각자적인 활동이었다. 이 씨앗은 10년 후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자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됐다.

송재는 미국에 건너간 이후부터 3·1운동 전까지 개인사업에 전념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 사업을 경영하는 와중에 이승만 윤병구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과 교류를 놓지 않았다.

국내에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1922년까지 4년 여 동안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이상을 만방에 알렸다.

새로 설립한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통해 ‘Korea Review’를 비롯한 다양한 선전용 책자를 발간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직접 미국 각 지역을 돌며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강연활동을 전개하고 친한 여론을 형성시켰다. 또 미국인이 중심이 된 한국친우회를 미국 전역 21곳에 결성, 미국 의회와 언론,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토록 했으며, 이러한 한국친우회는 영국과 프랑스에도 각각 설립돼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 여론화되는데 이바지했다.

김중채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제10회 송재문화제’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서재필기념공원
1921년 11월 시작된 위싱턴군축회의에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발한 독립외교를 추진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당시 침체된 미주한인사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다.

1926년 9월 펜실베니아대 의과대학에 입학해 20년 이상 떠나 있던 의사의 길로 복귀한 그는 의학을 연구하며 의사로서 분주하게 지내는 동안에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수많은 글을 기고해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 의해 미군정청 수석고문으로 초빙된 송재는 1947년 고국을 떠난 지 49년 만에 83세의 나이로 환국했다. 약 1년 간 한국에 머물면서 라디오 방송과 강연, 각종 면담과 저술 등을 통해 통일된 근대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해방정국을 정돈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국내 주요 인사들이 송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도 했으나, 국내 정치계의 혼란을 개탄하며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항년 86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1977년 송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1994년 4월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됐고, 워싱턴시는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그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송재 선생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된 날을 기념하는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의 ‘송재문화제’가 열려 각계 인사들과 군민들이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긴다. 지난 4월 송재 서재필 탄생 159주년 기념 및 서거 72주기를 추모하는 제10회째 행사에 350여 명이 참석해 그를 기렸다.
김민빈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문화일반 최신뉴스더보기

기사 목록

광남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