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보는 사람들이 위안 받았으면 좋겠네요"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김왕주
유년기부터 줄곧 그림 보며 성장 ‘행복 회화’ 창작 집중
아크릴 패널에 작업 첫 시도…평면·입체적 작품에 천착
해외 레지던시 참여 희망·석봉미술관서 3인 전시 예정도
입력 : 2023. 03. 02(목) 17:26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 작가
그와는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전화 통화 몇번 한 것이 전부다. 화단 생활이 오래됐지만 사람들과 접촉을 선호한다기 보다는 다소 최소화하는 듯 보였다. 취재 일정을 잡기 위해 전화했던 날 역시 그는 한발 뒤로 뺐다. 이유는 대단하게 활동하는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 할까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로 다독이며 일정을 잡았다. 전남 화순 출생 서양화가 김왕주씨 이야기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를 꿈꿨다고 한다. 유년기부터 소질이 있어 초등시절에는 자신의 그림이 학교에 걸렸다. 숫자든, 무엇이든 간에 다 그림으로 표현할 만큼 그림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동창생이 손봉채 작가였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림이 재미있어 그림을 쳐다봤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계속해서 그림 속에서 지냈다.

‘집안 사람 중 미술을 하는 사람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미술 입문에 첫발을 떼게 된다. 진원장 전 조선대 교수와 친구간이었던 분이 미술교사였던 김경숙씨다. 그는 진 전 교수가 학원장이었던 광주 드가학원에 다니게 연결해줘 수채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고 술회한다.

중학교를 마치자 경신여고로 진학한 그는 미술부에 들어가 미술부 반장을 맡아 한발짝 더 미술로 기울어가는 학창시절을 보낸다. 데생과 수채화에 주력하던 무렵이다. 여고에 입학 후 로댕화실로 옮기면서 광주고등학생 미술동아리 ‘선샘회’ 활동을 펼쳤다.

그후 조선대 미술대 회화과에 진학한 그는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데생과 수채화에 집중했음은 물론이다. 대학 시절에는 윤형재 교수 영향으로 설치미술과 입체작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주요 작품들이 실크스크린 판화와 함께 오브제를 사용, 반 입체작업과 설치작업을 하게 된다. 이처럼 그의 학창시절은 모두 미술을 빼놓고는 전개되지 않을 정도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 후 개인 레슨을 하면서 작업을 지속, 그룹전에 참여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4년 6월 지금은 사라진 빛고을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프로작가로 데뷔한다.

‘삶’ 주제로 실크스크린과 오브제를 사용한 입체작업을 선보였다. 1995년 결혼을 했고, 꾸준히 작업활동을 하면서 ‘www.현대미술가회’ 창단멤버로 활동 중이다. 한동안 조대 여성 작가 동인그룹 ‘선후인’에서 활동을 했다.

서양화가 김왕주씨는 “‘행복해하는 그림’과 ‘행복해지는 그림’을 그리며 웃을 수 있는 작가로 평가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왕주 작 ‘바람 불어 좋은 날’
김왕주 작 ‘바람 불어 좋은 날’
그의 작업 시기는 제1기인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제2기인 2015년부터 2016년 초까지, 제3기인 2016년 초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 때는 네 차례의 전시를 진행했을 만큼 활발하고 꾸준하게 활동을 펼쳤으며, 제2기 때는 그의 미술세계나 작업 방향에 대한 고민과 변화가 읽힌다.

서양화가인 정송규 무등현대미술관 관장으로부터 ‘어떤 그림을 할래’ 질문을 받으면서 방향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실제 ‘화려한 외출’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세화전에 출품해 호응을 얻은 바 있는데 아크릴 패널에 아크릴 작업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제 또래들로도 처음 시도하는 작업 스타일이었죠. 패널 뒤에서 그림을 거꾸로 그려 완성해가는, 어려운 작업인데 재미도 있고 느낌도 있어 스크래치나 잔선 등을 가하면서 작업에 집중했어요. 아크릴판만 거꾸로 해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거꾸로 그려 앞에서 볼 때는 정상적 그림으로 보이게 해야 해 머리를 많이 써야 했지요.”

이 전시에 닭 그림을 출품했는데 자신은 날지 못하지만 의미가 있던 전시로 기억한다. 닭의 비상을 투영해 자신을 어떻게 날게 해볼까를 깊이있게 천착했었기 때문이다.

전시를 소개하는 배너나 포스터에 자신의 닭 그림이 실렸다고 한다.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어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아들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림, 가족이 웃을 수 있는 그림, 자신이 웃을 수 있는 그림, 모두에게 치유와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림을 생각했다.

또 그가 들려주는 장점은 판화 느낌이 나서 반응이 좋아 본격적으로 아크릴 패널을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했는데 2017년 아트페어에서 판매 순위 2위를 할 만큼 바로 미술시장에서 효과가 확인된 것이다.

다만 그에게도 공백기는 찾아왔다. 제1기와 2기 사이인 2011년부터 2015년까지다. 5년 여 간 카페매니저로 근무해서다. 그의 삶에서 처음 붓을 놓았던 시기다. 그가 공백기를 잘 극복해내고 화단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 데는 정송규 관장의 공이 컸다. 카페를 찾아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던 그에게 ‘그림을 그려야 할 네가 여기서 뭐하냐’라며 다시 시작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다. 개인전을 열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했다. 그가 붓을 놓았던 이면에는 결혼과 가정 경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우선 그림 외 환경이 그림을 용납할 정도가 되지 못했던 탓이다. 당시 ‘그림이 사치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다시 붓을 잡은 그는 결국 정송규 관장의 약속 대로 2015년 말 ‘바람, 바람’이라는 주제로 무등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다시 화단으로 복귀한다. 이 전시회가 4~5년 여의 미술 밖 생활을 청산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바람은 자연현상으로서의 바람과 마음의 희망인 바람을 중의적으로 대비시킨 의도다. 오브제로 생명력이 있는 나무를 활용해 세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혼자 고유의 아름다움을 갖춰 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가는 것을 표시하면서 거기다 색동을 추가한 것이죠.”

김왕주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김왕주 작 ‘화장대’
김왕주 작 ‘인연’
아울러 2017년 그해 광주아트페어에 참여해 다수 작품을 판매해 의미를 더했다. 따뜻하고 웃을 수 있는, 행복한 내용에 스스로 나아가는 능동적 캐릭터인 인디 오방색을 바탕으로 다양한 색채를 사용해 화폭을 구현했다.

2019년에는 양림미술관에서 여섯번째 개인전이 열렸는데 화면에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어떤 관람객이 와서 자신의 작품전을 관람한 뒤 ‘죽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림이 너무 좋아 (그림을 보고)마음을 다잡았다’면서 나중에 고맙다고 장미 꽃송이를 사와 감사함을 표했다는 술회다.

“조금 더 그림이 따뜻해졌죠. 색감이 화려하고 풍성해졌습니다. 제가 웃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웃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행복한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싶어요.”

그는 관람객들이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봐주면 만족이라고 말한다. 만족이 키워드로 해석된다. 그의 작업 모토가 행복해지는 그림인 이유다. 여기다 그의 화폭에서 자주 보이는 색동의 의미를 묻자 작가는 색감에 바라는 바람이 있었는데 ‘애기들 오래 살으라’고 하는 의미가 투영돼 있다는 것까지 들려줬다. 이 색동의 출발은 유년 시절 자신을 이뻐해줬던 할머니인 듯하다. 늘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줬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한복이나 댕기까지 만들어줬을 정도로 자신을 애꼈다’고 귀띔한다. 이때 할머니의 기원을 넣어 작업을 펼치다 보니 색동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아트페어에 계속 출품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10월 초 화순 석봉미술관에서 3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해 11월 개인전이 잡혀 있었으나 너무 바빠서 열지 못해 아쉬워 하는 마음도 전했다. 그의 계획을 보면 모든 욕심을 빼버린 듯 읽힌다. 현재 ‘인디’, ‘화장대’, ‘인연’ 시리즈로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해 왔다. 작가는 작업적으로 색동을 계속하면서 캐릭터 등 조형물을 만드는 동시에 해외 레지던시 참여 의사도 내비쳤다. 그리고 지난해 독립 공간으로 강동문화공간이라고 하는 명칭의 작업실이 생기면서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됐다.

작가는 이 작업실에서 긍정의 삶과 감사하는 삶, 그로 인해 더 커지고 더 넓어지는 행복의 감정을 투영하면서 작업을 지속해갈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됐으면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행복해하는 그림’과 ‘행복해지는 그림’을 그리며 웃을 수 있는 작가로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제 작품을 보고는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반응을 보이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위안을 받았듯이, 저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선주 기자 view2018@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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