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적 화폭 한계 그림 새롭게 끄집어낼까 고민"
[남도예술인] 서양화가 전현숙
화가가 꿈 대학 졸업 후 붓 놓았지만 다시 작업 매진
슬럼프 극복 소녀·중년 여성 은유와 해학으로 풀어
얼굴에 변화 시도…뒷모습에 주력 이야기 전개 각오
입력 : 2023. 02. 02(목) 18:22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전 작가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아픔 없는 사람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구성원 중 모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대학을 졸업 후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었으나 빨리 찾아온 인연과 결혼, 아이 출산 등으로 인해 한동안 붓을 놓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졸업 후 붓을 놓은 채 생활전선에서 생계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를 화단으로 다시 호출한 것은 동료와 선후배들이었다.

한동안 붓을 놓았기에 자존감이 무너지는 바람에 화단으로의 복귀를 앞두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침 동료(윤남웅 작가)와 선후배들의 작업에 대한 권유에 힘입어 붓을 다시 쥐었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한 뒤 1993년까지는 작업을 아예 하지 못했던 시기다. 첫 개인전을 1999년에서야 열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작업자로서 붓을 잡으며 한때 슬럼프가 찾아오기는 했으나 독창적 회화를 일궈온 가운데 현재까지 창작생활을 지속해오고 있다.

주인공은 유년기의 무표정한 얼굴 자화상으로 독창적 회화 활동과 작업을 줄곧 병행해온 서양화가 전현숙씨. 그는 생활이 아무리 녹록지 않더라도 새벽까지 작업을 했을 정도로 열망을 발휘했다.

앞서 언급했듯 1993년까지 작업을 쉬었기에 감각을 되찾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 이듬해 대학 1년 후배인 박수만 화가가 ‘크로키황토드로잉회’를 결성하자 회원으로 가입해 거기에서 손을 풀 수 있었다. 크로키에 천착했지만 당시에는 크로키가 한 장르로 정착하지 못하던 때였다. 모두 밑그림 정도로 인식해서다.

하지만 그에게 크로키는 다시 붓을 잡고 감각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전시 역시 박수만 화가가 날짜를 접어줘 누드크로키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때 그는 기존의 크로키를 탈피해 마치 남자가 그린 것 같은 크로키를 구사했다.

“자신감은 없었는데 그림을 다시 하고픈 욕망이 일었어요. 작업을 못했지만 그 감각을 깨우기 위해 전시장을 엄청 많이 찾아다니는 노력을 펼쳤죠.”

전현숙 작가는 “어떤 식으로 제 그림을 새롭게 끄집어낼까 고민을 많이 했다. 화단이든, 관람객들이든 저에 대해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이자 진정한 작업을 펼친 작가로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
독창적 회화로 인해 전현숙 작가 하면 소녀와 중년 여성이 소재로 떠오른다. 그것이 대표적 이미지가 됐다. 오랜 시기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고는 있지만 그가 어떤 사연으로 인해 이같은 독특한 화풍을 추구하는 지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부유하게 살았지만 부친이 중학교 2년 때 다쳐 고3 때 식물인간처럼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일은 그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가정을 꾸리면서 동반된 슬픈 기억들 역시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 계기가 됐다. 소녀와 중년 여성은 작가 자신을 반추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을 동화적 상상력 등 그만의 감정을 투영해 회화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회화세계를 시기별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제3기 정도로 나눠 접근해볼 수 있는데 제1기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제2기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제3기는 2006년부터 현재까지다. 제1기 때는 크로키를 하면서 손에 잡히는 작업을 했다. 형식이나 실험작업에 대해 많은 시도를 했던 이면에는 자기만의 그림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그림을 찾기 위해 고심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어 제2기 때는 동화적 상상력을 투영하면서 대작을 흑백으로 시도를 했는가 하면, 거칠고 강한 작업을 구사했다. 마티에르나 붓 터치에 집중하는 시기로 전반적으로 화폭이 강렬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제3기인 현재는 살면서 느꼈던 사람들 관계나 감정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마흔에 접어들던 2007년 광주시립미술관 양산동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할 무렵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제 이야기를 작업에서 풀어나갔는데 마치 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죠. 그림에 여성이 20대 몸으로 나와서, 제 이야기를 진실되고 노골적으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7년 롯데갤러리 초대전 당시 노골적으로 표현을 했고, 기존의 그림과 다르게 소녀와 여성을 형상화했습니다. 형태는 부드러워졌지만 색이 화려해졌으며 전반적으로 둥글둥글하게 그렸구요. 저를 닮게 그리고, 제가 갖고 있는 특징을 많이 투영했어요,”

‘그 여자’
문화공간 예술이 빽그라운드에서 열린 개인전(2022.11.14~12.30) 전시 전경
2007년 이전에는 20대 여성을 이쁘게 그리는데 천착했지만 2007년 이후 노골적인 중년 여성을 그리는데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행복한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은유적이고 해학적이었다. 유년 시절을 생각하다 보니 점점 어린 아이를 표현하게 됐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이때 그는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전한다. 이것 또한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치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화사한 색상이 튕겨나온데는 우울과 슬픔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작가만의 고육책으로 보였다. 이 우울과 슬픔은 스스로 삭히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그의 성격이 한몫 거든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단적으로 변화된 것이 강한 색상이었고, 내용이 더 풍부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은유와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굳어져 있는 이미지를 탈피해 몸을 빼고 다양한 감정이 투영된 얼굴로만 작업하기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그렸지만, 상처가 계속 올라왔다고 밝힌다. 자신의 얼굴 그림에 상처가 있는 관계로 얼굴에 변화를 가하는 동시에 뒷모습에 천착해 이야기를 풀어갈 각오다.

마지막으로 ‘어떤 작가로 평가받았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는 진지하게 작업에 접근하는 작가로 기억됐으면 하는 생각을 내비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몇 년 전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개성적 화폭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서죠. 아줌마에서 아이까지 같은 그림 패턴으로 형식이 굳어진 것이 원인이 아닐 지 생각했어요. 어떤 식으로 제 그림을 새롭게 끄집어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화단이든, 관람객들이든 저에 대해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이자 진정한 작업을 펼친 작가로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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