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영재 키우는 씨앗 뿌려야 ‘지역 음악 생태계 기여’
[남도예술인] 피아니스트·작곡가 박의혁
4세 피아노 시작 광주예고 나와 미국서 연주학 전공
작곡한 곡 수록 클래식 음반 발매 및 악보집 출판
지역 출신 자부심 음악 인재 양성 주력 3집 계획도
입력 : 2022. 11. 17(목) 18:13
박의혁씨의 연주 모습.
피아노 앞에 앉은 네 살 남자 아이가 누군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선율을 따라 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들리는 음대로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눌러봤다. 몇 번 반복해서 치니 들으면 듣는 대로 어떤 곡이든 칠 수 있었다. 절대음감 덕분이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 악보를 보는 법을 익히기 전까지 그는 음반을 들으며 피아노를 쳤다. 동요와 연습곡 등 어떤 곡이든 듣고 똑같이 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그와 피아노와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광주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박의혁씨가 맨 처음 피아노에 재미를 붙인 때의 이야기다.

이런 그를 지난달 광주 북구 운암동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랜드피아노가 한 대 놓인 널찍한 작업실. 피아노 앞에 앉아 그가 건반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자 그의 손끝이 애절한 선율로 바뀌어 울려 퍼졌다. 맑고 구슬픈 선율이 순식간에 콘서트홀로 바뀐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잔잔한 듯하지만 격정의 감정이 서려 애틋했다. 그렇다고 마냥 슬프지만도 않았다. 막바지로 갈수록 다양한 감정이 드는 곡이었다. 곡이 끝나자 온 마음이 촉촉해졌다.

박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은 ‘애상’이었다. 따뜻함이 깃든 그 선율은 지친 마음을 회복하기에 충분했다.

박 교수가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머니가 30여 년간 광주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을 터다. 이 덕분에 박 교수 뿐만 아니라 삼형제가 모두 음악을 전공했다.

삼형제 중 둘째인 박 교수는 학습 습관이 형성되는 네 살 때부터 음악과 함께했다. 광주예고를 졸업하고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피아노연주학을 전공, 미국 매릴랜드대학에서 피아노연주학을 전공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형인 박정혁씨는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동생인 박성혁씨는 이스트만 음악대학에서 연주학과 교육학을 각각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과 가까이 있었기에 음악을 하는 게 당연했다는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찐 음악’에 눈을 뜨는 사건과 마주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의 무대를 보고 나서 ‘진짜 음악’을 알게 됐어요. 부조니의 ‘카르멘 환상곡’이었는데 완벽한 기교 뿐만 아니라 흘러나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모두 동글 동글한 느낌이랄까요. 그 전까지 남들보다 빨리, 안 틀리게, 크게 치면 잘하는 건 줄 알았죠. 누구나 연습하면 손가락은 돌아가는 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 뒤로는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됐죠.”

진짜 음악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 매일 10시간 이상 피아노와 씨름했다.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재능을 꾸준히 연마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가만히 있으면 연주자는 뒤처지기 마련이고, 연습량이 적으면 무대에서 좋은 음악을 선사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아노 연주에 매달려온 그는 클래식에 국한하지 않고 재즈에도 관심을 뒀다. 악보를 넘어 그날의 기분과 상황이 음으로 탄생하는 데 매력을 느껴서다. 이같은 경험이 나중에 작곡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는 작곡과 지휘로까지 보폭을 넓히게 된다. 연주자들이 연주 활동을 넘어 예술적인 조화를 이끌어 아름다운 곡을 들려주기 위해 지휘자로 활동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스스로 곡을 만들고, 그 곡들로 무대를 채우는 일은 흔하지 않아 신선하게 다가왔다.

“연주를 하다 보니 제 곡을 남기고 싶더라구요. 모차르트와 베토벤, 쇼팽, 바흐,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 우리가 기억하는 음악가들은 대부분 작곡과 연주를 같이하죠. 연주만 잘 하는 사람들은 잊히는 것 같달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곡을 연주하면서 저를 기억할 수 있도록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작곡을 하게 된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작곡해 제1회 광주세계아리랑축제에서 연주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호기심 많은 소녀가 별을 구할 목적으로 여행길에 오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저 별이 위험하다’의 작곡을 맡기도 했다.

곡을 쓰던 그는 내친 김에 작곡한 곡을 모아 클래식 음반을 발매했다.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클래식 음반을 발매하고 그 곡들로 연주회를 가졌다. 이렇게 탄생한 게 1집 ‘사계’와 2집 ‘무언가’다. 2019년에는 1집 악보 ‘24개의 프렐류드’ 출판 기념 독주회를 열고 24곡이 수록된 악보집을 펴냈다.

지난해까지 2년간 광주문화재단 문화예술 부문 자문위원을 역임한 그는 올해도 바쁘게 보내고 있다. 원로문화예술인구술채록사업의 음악분야를 맡아 영상과 텍스트로 이들의 업적을 기록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어서다. 이와 함께 야외공연창작지원사업의 멘토로 참여해 지역 공연예술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이들이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피아니스트·작곡가 박의혁씨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하는 아이들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한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10년, 20년 뒤에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면 뿌듯할 듯 하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3집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작곡한 곡들로 노래를 만들어 가수들과 녹음해 음반을 발매하는 것은 물론, 3집 발표 독주회도 계획 중이다.

이외에 그는 광주를 기반으로 한 음악 인재 양성 프로젝트 ‘NEC영재뮤직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이끌고 있는 NEC예술기획이 젊은 예술인들로 구성된 청년예술단체 푸른달과 함께 어릴 적부터 음악이란 무엇이고, 좋은 음악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등 어린이들이 진지하게 음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학생들이 대상으로 7~9월 1분기, 10~12월 2분기로 나눠 운영된다. 기존 피아노 레슨은 그대로 유지하되 일주일에 한 번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연주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일종의 마스터클래스인 셈이다. 우수 선발자가 되면 푸른달에서 장학금으로 전액 수업료를 지원한다. 다행히 참가하겠다는 참여자들이 많아 자리가 부족하다. 향후 그가 보유한 네트워크를 동원해 피아노 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들로 운영 클래스를 늘려나갈 복안이다.

“광주예중이 생기면서 광주영재원에서 개설, 운영하던 초등학생 프로그램이 사라져서 안타깝더라고요. 일찍부터 재능을 키울 수 있는 창구가 하나 사라진 것 같았죠.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하는 사회 환원 프로젝트라기 보다는 그저 지역에서 여러 클래식 인재들이 나왔으면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늘고 시간이 쌓여 ‘광주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대’ 혹은 ‘클래식을 하려면 여기는 꼭 가봐야 돼’라는 인식이 자리잡혔으면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앞으로의 바람을 들려줬다.

“제가 가진 인프라와 재능이 지역 클래식 생태계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연주와 작곡을 활발히 할 거예요. 또 인재 양성 프로젝트가 클래식 영재를 키우는 씨앗이 된다면 더할나위 없겠죠.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하는 아이들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10년, 20년 뒤에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면 뿌듯할 듯 하네요.”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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