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공연 중에서도 ‘으뜸’이란 소리 듣고 싶죠"
[남도예술인] 사단법인 소리연(緣) 대표 김연옥
중견예술인들 협업 창단…첫 정기 연주회 성료
전남대 음교과 출강 국악교육학과 필요성 강조
"선후배 잇는 국악계 ‘허리’ 역할 해낼 것" 밝혀
중견예술인들 협업 창단…첫 정기 연주회 성료
전남대 음교과 출강 국악교육학과 필요성 강조
"선후배 잇는 국악계 ‘허리’ 역할 해낼 것" 밝혀
입력 : 2022. 11. 10(목) 17:59

김연옥 명창은 “광주에 볼 수 있는 국악공연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고 재밌는 무대를 선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 9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는 사단법인 소리연(緣)의 첫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명절을 앞두고 찾아온 태풍으로 인한 궂은 날씨에도 객석은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로 가득 찼다. 국가 무형문화재 윤진철 명창, 아쟁 김영길 명인, 버꾸춤 서한우 명무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명인들과 전문 국악 예술인들이 출연해 소리와 무용, 기악이 어우러진 풍성한 무대를 선사했다.
‘국악의 향기, 소리의 향연, 시민이 즐기다’라는 주제로 펼쳐진 이날 공연에서는 세 명인의 무대뿐 아니라 김연옥 사단법인 소리연 대표와 그의 단짝인 소프라노 정수희씨가 꾸민 합동 무대가 화제였다. 광주예고부터 전남대, 광주시립예술단까지 이어져온 두 사람의 우정이 빛을 발한 무대였다.
“성악과 판소리가 주는 각각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장르의 느낌을 연출해보고 싶었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좋아 다행이었죠. 공연이 끝나고 장문의 메시지로 감동을 받았다는 피드백을 준 관객 분들도 여럿 계셨어요. 제자들에게도 너무 멋진 공연이었다는 찬사를 받으니까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어요.”

사단법인 소리연은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중견 예술인 40여 명이 협업해 만든 단체로, 지난해 6월 법인체를 등록하며 정식 창단했다. 김 대표는 “국악계의 중간세대로서 스승과 후배들 사이 ‘허리’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고 밝혔다.
“선생님들을 모시면서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어요. 이미 오랜 연륜이 있는 선생님들과 달리 젊은 친구들은 길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저와 같은 중간세대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하죠. 또 전문 예술인들이 평소 도전하고 싶었던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었어요. 전통의 뿌리는 훼손하지 않되 대중에게 색다른 콘텐츠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에서죠.”
코로나19로 인해 미룰 수밖에 없었던 첫 정기 연주회를 준비하며 김 대표가 추구했던 점은 ‘정말 볼만한 공연을 보여주자’였다. 여러 무대 중 단 한 대목도 지루할 틈 없는 퀄리티 높은 공연을 선보이고자 했다.
“창단 공연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어요. 윤진철, 김영길, 서한우 선생님을 한 자리에 모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모두 흔쾌히 무대에 서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선생님들의 연륜에 젊은 친구들의 에너지가 합쳐져 시너지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준비하면서 관객들은 물론 참여한 공연자들도 모두 즐거웠으면 하고 바랐는데, 끝난 후 다들 공연할 맛이 났다고 말해줘 기뻤어요.”

김연옥 대표와 판소리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집안의 큰 어른이셨던 김윤덕 명인(1918~1978,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의 영향으로 집에서 국악을 듣는 건 익숙했다. 곁에는 늘 카세트와 테이프가 있었고, 학교에 다녀오면 국악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취미로 북을 치셨고 어머니는 성악을 즐겨 들으셨다. 가요보다는 ‘사랑가’를 따라 부르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환경이 자연스럽게 이 길을 갈 수 있는 밑거름이 돼준 거 같아요. 커오면서 항상 제 곁엔 국악이 있었거든요. 아버지 손을 잡고 국악 공연을 보러 간 적도 많았죠.”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국악을 배워보라는 교장선생님의 권유에 처음 소리 공부를 하게 됐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강광례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사사하고 광주예고 국악과에 진학했다. 이후 전주에 조소녀 선생(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에게 ‘심청가’, ‘춘향가’ 등을 배우며 소리의 폭을 넓혀갔다.
졸업 후 전남대 국악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때 시립창극단 시험을 보고 단번에 합격하며 예술단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에 들어간 이후 고 성창수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을 찾아가 ‘춘향가’를 사사했다.
올해로 22년째 광주시립창극단 단원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다양한 무대를 통해 국악의 아름다움을 국내외로 알려왔다. 미국 카네기 홀 공연을 비롯해 일본, 중국,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수없이 참여했다. 흥보가 2번, 심청가 2번의 개인 발표회를 준비해 선보이는 등 쉬지 않고 기량을 갈고 닦아왔다.


그런 그에게 국악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2017년 열린 ‘제25회 임방울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쥔 순간이다. 4년의 도전 끝에 마침내 얻어낸 결실이었다.
“40세 전에 꼭 상을 타야겠다고 자신과 약속했었어요.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참고 버텨야겠다 생각했죠. 판소리는 자신과의 싸움이라서 연습량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해요. 대통령상을 타기까지 5~6년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죠. 원하던 상을 타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리연을 창단하게 됐습니다.”
김 대표는 4년째 전남대 음악교육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 서양악기를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국악을 교육하는 법을 가르친다.
아쉬움이 있다면 국악 전공자가 공부할 수 있는 국악교육학과의 부재다. 세계에 나가 가장 경쟁력 있는 것은 그 나라만의 문화예술인데 정작 국내에서 국악교육 과정이 부실한 현실이 안타깝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국악을 정식으로 배운 전공자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으면 하죠. 음교과 학생들은 국악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단기간에 국악을 배워야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국악을 전달하는데 한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죠. 실기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크고요. 넓게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문화예술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김 대표는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게 과거의 생활이고 최선이었다면 변화한 시대에 걸맞게 전통을 재창조하는 것도 미래 세대가 이끌어가야 할 숙제라고 설명했다.
“시대는 계속 바뀌잖아요.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음악이었다고 한다면 그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관객과 대중이 찾아주는 음악이 남는 거니까요.”
소리연은 이번 공연으로 성공적인 첫 시작을 알렸다. 앞으로 소리연 활동을 통해 그간 보여주지 못했던 다양한 색깔의 음악에 도전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매년 한가위가 되면 지역은 물론 타지 사람들까지 소리연 공연을 보기 위해 광주를 찾게 되면 좋겠어요. 명절 한가위 공연으로 계속 이어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죠. 나중에 서울이나 더 큰 무대에서 공연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요. 광주에 볼 수 있는 국악공연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수준높고 재밌는 무대를 선보일 겁니다.”
‘국악의 향기, 소리의 향연, 시민이 즐기다’라는 주제로 펼쳐진 이날 공연에서는 세 명인의 무대뿐 아니라 김연옥 사단법인 소리연 대표와 그의 단짝인 소프라노 정수희씨가 꾸민 합동 무대가 화제였다. 광주예고부터 전남대, 광주시립예술단까지 이어져온 두 사람의 우정이 빛을 발한 무대였다.
“성악과 판소리가 주는 각각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장르의 느낌을 연출해보고 싶었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좋아 다행이었죠. 공연이 끝나고 장문의 메시지로 감동을 받았다는 피드백을 준 관객 분들도 여럿 계셨어요. 제자들에게도 너무 멋진 공연이었다는 찬사를 받으니까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어요.”

2022 소리연 정기 연주회 ‘국악의 향연’ 무대를 마치고 인사하는 김연옥 명창과 출연진들.

정기 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부르고 있는 김연옥 명창.
“선생님들을 모시면서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어요. 이미 오랜 연륜이 있는 선생님들과 달리 젊은 친구들은 길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저와 같은 중간세대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하죠. 또 전문 예술인들이 평소 도전하고 싶었던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었어요. 전통의 뿌리는 훼손하지 않되 대중에게 색다른 콘텐츠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에서죠.”
코로나19로 인해 미룰 수밖에 없었던 첫 정기 연주회를 준비하며 김 대표가 추구했던 점은 ‘정말 볼만한 공연을 보여주자’였다. 여러 무대 중 단 한 대목도 지루할 틈 없는 퀄리티 높은 공연을 선보이고자 했다.
“창단 공연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어요. 윤진철, 김영길, 서한우 선생님을 한 자리에 모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모두 흔쾌히 무대에 서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선생님들의 연륜에 젊은 친구들의 에너지가 합쳐져 시너지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준비하면서 관객들은 물론 참여한 공연자들도 모두 즐거웠으면 하고 바랐는데, 끝난 후 다들 공연할 맛이 났다고 말해줘 기뻤어요.”

소프라노 정수희 성악가와 함께 ‘한오백년’을 부르는 모습.
김연옥 대표와 판소리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집안의 큰 어른이셨던 김윤덕 명인(1918~1978,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의 영향으로 집에서 국악을 듣는 건 익숙했다. 곁에는 늘 카세트와 테이프가 있었고, 학교에 다녀오면 국악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취미로 북을 치셨고 어머니는 성악을 즐겨 들으셨다. 가요보다는 ‘사랑가’를 따라 부르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 환경이 자연스럽게 이 길을 갈 수 있는 밑거름이 돼준 거 같아요. 커오면서 항상 제 곁엔 국악이 있었거든요. 아버지 손을 잡고 국악 공연을 보러 간 적도 많았죠.”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국악을 배워보라는 교장선생님의 권유에 처음 소리 공부를 하게 됐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강광례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사사하고 광주예고 국악과에 진학했다. 이후 전주에 조소녀 선생(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에게 ‘심청가’, ‘춘향가’ 등을 배우며 소리의 폭을 넓혀갔다.
졸업 후 전남대 국악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때 시립창극단 시험을 보고 단번에 합격하며 예술단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에 들어간 이후 고 성창수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을 찾아가 ‘춘향가’를 사사했다.
올해로 22년째 광주시립창극단 단원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다양한 무대를 통해 국악의 아름다움을 국내외로 알려왔다. 미국 카네기 홀 공연을 비롯해 일본, 중국,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수없이 참여했다. 흥보가 2번, 심청가 2번의 개인 발표회를 준비해 선보이는 등 쉬지 않고 기량을 갈고 닦아왔다.

소프라노 정수희씨와 김연옥 명창.

‘제25회 임방울 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당시 모습.
그런 그에게 국악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2017년 열린 ‘제25회 임방울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쥔 순간이다. 4년의 도전 끝에 마침내 얻어낸 결실이었다.
“40세 전에 꼭 상을 타야겠다고 자신과 약속했었어요.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참고 버텨야겠다 생각했죠. 판소리는 자신과의 싸움이라서 연습량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해요. 대통령상을 타기까지 5~6년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죠. 원하던 상을 타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리연을 창단하게 됐습니다.”
김 대표는 4년째 전남대 음악교육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 서양악기를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국악을 교육하는 법을 가르친다.
아쉬움이 있다면 국악 전공자가 공부할 수 있는 국악교육학과의 부재다. 세계에 나가 가장 경쟁력 있는 것은 그 나라만의 문화예술인데 정작 국내에서 국악교육 과정이 부실한 현실이 안타깝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국악을 정식으로 배운 전공자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으면 하죠. 음교과 학생들은 국악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단기간에 국악을 배워야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국악을 전달하는데 한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죠. 실기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크고요. 넓게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광주시립창극단 단원들과 함께한 김연옥 명창.
“시대는 계속 바뀌잖아요.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음악이었다고 한다면 그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관객과 대중이 찾아주는 음악이 남는 거니까요.”
소리연은 이번 공연으로 성공적인 첫 시작을 알렸다. 앞으로 소리연 활동을 통해 그간 보여주지 못했던 다양한 색깔의 음악에 도전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매년 한가위가 되면 지역은 물론 타지 사람들까지 소리연 공연을 보기 위해 광주를 찾게 되면 좋겠어요. 명절 한가위 공연으로 계속 이어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죠. 나중에 서울이나 더 큰 무대에서 공연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요. 광주에 볼 수 있는 국악공연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수준높고 재밌는 무대를 선보일 겁니다.”
김민빈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