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자녀들, 이밥에 고깃국 실컷 먹이고 싶어"
탈북민 박선안씨, 눈물의 추석 명절 보내기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 때 부모·남편·가족 잃어
2009년 남한 정착…코로나로 합동차례도 못 지내
입력 : 2020. 09. 28(월) 17:35
지난해 추석 때 열린 북한이주민 추석맞이 합동차례 및 나눔잔치에서 박선안씨가 발표를 하고 있다.
민족 대명절 추석을 앞두고 제수음식 준비로 분주한 여느 가정과 달리, 눈물로 명절을 쇠는 사람들이 있다.

전국적으로 3만3000여 명, 광주·전남지역에만 1200여 명이 살고 있는 ‘북한 이탈 주민들’이다.

이들 대부분 고향인 북녘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온 경우가 많은 터라 가족, 친지가 모두 모이는 명절 때만 되면 그리움과 회한에 더욱 사무친다.

최근 광주 광산구 우산동 한 아파트에서 만난 박선안씨(79·여·가명)도 남한에 정착한 지 올해로 12년이 됐지만, 여전히 명절은 그리움과 눈물로 보내기 일쑤다.

북녘 고향에 두고 온 3명의 아들·딸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함경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장진군에서 나고 자란 박씨는 10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매일 쏟아지는 한미연합군의 폭격으로 북한 전역이 쑥대밭이 되면서 박씨는 부모와 함께 산으로 피신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이후 고향을 떠나 신흥군 신흥읍에 정착하게 됐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급격한 경제발전을 달성한 남한과 달리 북한은 좀처럼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지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인 ‘고난의 행군’에 돌입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을 호소하며 죽어 나갔다.

당시 남한의 집배원 격인 ‘우편 통신원’으로 활동한 박씨는 월급에 해당하는 배급표를 꾸준히 모아 남편과 자녀 6남매, 그리고 부모까지 봉양하며 남들보다는 배고픔이 덜 겪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면서 보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오던 배급표 지급이 점차 줄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틀에 한번 꼴로 뚝 끊기면서 온 가족이 영양 실조와 배고픔에 허덕여야 했다.

결국 남편은 간암으로, 부모와 3명의 아들, 딸이 배고픔으로 세상을 떠나자 박씨는 남은 자녀들과 함께 ‘남한행’을 결심했다.

다만, 남은 3명의 자녀 중 전혀 다른 환경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 한 2명을 제외하고 딸 1명과 함께 박씨는 중국 심양, 라오스를 거쳐 지난 2009년 2월 남한 땅을 밟게 됐다.

남한땅에 정착하고 나서도 박씨는 강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지역 대형병원의 간병인으로 취직해 돈을 벌었고, 일부를 항상 북녘에 있는 자녀들에게 부쳤다.

돈을 전달할 때마다 브로커로부터 북녘에 있는 자녀들의 손편지와 사진 등을 전달받지만 되레 그리움만 더 커질 뿐이다.

특히, 추석과 같이 명절 때만 되면 북녘에 자녀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그리움에 가슴이 더욱 미어진다.

자녀들에게 고기와 꽃대밥(쌀밥)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푸짐한 한 상을 차려 북녘을 향해 놓곤 하지만 그때 뿐, 또 다시 그리움에 사무친다.

또 매년 설과 추석 명절 때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북한 이탈주민들과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었지만 이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이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박씨는 “말해 뭐해…아들 1명, 딸 2명이 아직 북한에 있는데…, (명절을 앞둔) 이맘 때면 텔레비전도 잘 안 봐. 가족을 만나는 장면만 보면 눈물이 쏟아져서…”라며 “죽기 전 가족 모두 모여 따뜻한 이밥과 고깃국 먹어보는 게 소원인데…”라고 말했다.
송대웅 기자 sdw0918@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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