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향연 ‘비엔날레 성공’ 감동 드라마 작성
[기획]장경화의 광주시립미술관 사반세기 여정
광주비엔날레 신화를 담다 <하>
무에서 유 만드는 심정…광주 ‘문화상품’ 가능성
순직한 동료 아픔 딛고 163만의 관람객 몰려들어
‘안티비엔날레’ 진행돼 쌍두마차로 시너지 효과도
광주비엔날레 신화를 담다 <하>
무에서 유 만드는 심정…광주 ‘문화상품’ 가능성
순직한 동료 아픔 딛고 163만의 관람객 몰려들어
‘안티비엔날레’ 진행돼 쌍두마차로 시너지 효과도
입력 : 2017. 09. 13(수)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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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선생 방문 당시 구 망월 묘역 참배 모습(앞줄 왼쪽부터 당시 이호준 비엔날레 관리본부장, 이용우 비엔날레조직위원회 전시기획실장,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강봉규 비엔날레 조직위 집행위원장).
1995년 9월5일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감동과 축하 속에 성대하게 개막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조직위의 전 직원이 하나가 돼 일궈 놓은 결과이다.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관람객은 163만이라는 단일 현대미술행사로 새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광주의 진보미술단체(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망월묘역 일원에서 ‘안티비엔날레-통일미술제’를 개최했다. 광주비엔날레와 안티비엔날레는 상호 상반된 개념이나 개막 이후 시너지효과를 증대시켰다. 이 모든 일에 홍보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열정적인 홍보를 위해 앞장서서 뛴 지역의 언론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3. 광주비엔날레, 꿈을 성공으로 쓰다
1995년 9월 20일, 드디어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로 개막했다. 감동의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개막 전날 비엔날레 설치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심사한 결과를 발표하는 시상식이 있었다. 대상수상자로는 예상을 깨고 흑인작가 ‘크초’(쿠바)로 선정됐고 그의 이름이 발표되자, ‘크초’는 개막식장 어느 구석에서 한참 만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상식장에 올랐다. 곧 그는 감동의 눈물을 쏟으며 대상 상패와 상금20,000$을 받았다.
‘크초’에게는 세금을 제외 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큰돈이었다.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지 않은 쿠바에서 한국(광주)까지 오는 데는 너무 긴 여정이었다. 그는 한국에 올 때 쿠바의 낡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입국했다. 그게 그가 준비한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인 것이다. 나머지는 광주에 준비를 요청한 ‘빈맥주병 2000개’와 ‘낡은 배’ 하나였다.
우리 비엔날레 조직위에서는 OB광주공장에 협조를 구해 맥주병을 확보하고 낡은 배는 수소문해 제2수원지에서 저수지 관리용 낡은 배를 구해 두었다. ‘크초’는 빈 병으로 쿠바지도를 만들었고 그 위에 낡은 배를 올려두고 호주머니에서 쿠바 지도를 작품 앞 벽에 붙였다. 그게 그의 작품 전부이다. 작품은 현재까지 광주비엔날레에서 보관 중이다.
그리고 전시 기간 전시장 입장을 위해 늘어선 줄이 장관을 이뤘다. 현대미술을 접하지 못했던 학생, 일반인을 비롯해 특히 어르신은 설치 영상 작품을 보면서 “무슨 쓰레기를 모아뒀다”, “이게 세계현대미술이라고?” 반응하며 신기해 했다. 특히 대상을 수상한 ‘크초’의 작품 앞에서는 황당해 하면서 “이러한 작품은 나도 만들겠다”며 웃었다. 관람객은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관람한 것이다.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관람자의 눈높이에서의 해석은 즐겁고 신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2번 3번 자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나름의 감상법과 분석력이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전시 기간 관람객은 163만명으로 공식 집계 됐다. 전 세계에서 현대미술전에 이렇게 많은 관람객을 동원한 사례는 없었다. 비엔날레 조직위에서도 개막이 다가오면서 입장권 예약과 단체관람객 예약을 확인받으면서 설마가 현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광주비엔날레 성공적 개최’란 눈물 어린 감동의 신화를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로 일궈 낸 것이다. 모두 광주시민의 문화의식, 헌신적인 자원봉사자, 그리고 광주시와 조직위원회 직원 모두의 열정으로 이룬 결과인 셈이다. 특히 당시 홍보에 적극적인 노력을 다해준 지역 언론사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4. 동료직원의 순직과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람객
필자가 근무하던 전시부의 마주 보는 책상에는 북구청에서 파견 나온 K씨(행정6급)가 있었다. K씨 업무는 참여작가, 초청자 여행일정 관리와 숙소 배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준비 기간에는 다소간 여유가 있는 업무를 맡았으나 개막 D-30일부터는 바쁘기 시작해 D-7일 부터는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었다. 작가와 초청자 약 200여명이 한꺼번에 K씨에게 몰린 것이다. 작가들의 여행일정 변경, 숙소 변경이 연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물론 사전에 일정을 조정하고 숙소를 배치했지만 계획과 현실의 상황은 늘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자유 분방한 예술인을 상대하는 일에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때가 많다.
필자는 그에게 행정업무의 도움을 많이 받는 터이고 선배인지라 가깝게 지냈다. “선배님은 건강도 좋지 못한데 비엔날레 파견을 자청하셨나요?”라고 묻자, K씨는 “건강이 좋지 못하지만 무리해서라도 파견 신청을 한 것은 5급 사무관으로 정년을 하고 싶어서네. 그래야 묘비에 ‘학생부군신위’가 아닌 ‘사무관부군신위’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K씨는 과도한 격무에 개막 3일 후 과로사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망월묘역에 모시는데 우리 직원 모두는 눈물로 그를 보내드리고 결국은 순직으로 인정받아 사무관으로 승진이 됐다.
전시장과 중외공원에 배치된 많은 자원봉사자의 눈부신 활동은 밀려오는 관람객을 안내 하는데 어려움은 있었지만 비엔날레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과 책임감으로 하나가 돼 있었다. 비엔날레조직위는 이러한 자원봉사자들과 광주시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전시장 내에 다양한 설치 영상 작품관리는 힘든 일이었으나 별일 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모두 자원봉사자의 섬세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홍보가 잘된 ‘광주비엔날레’는 일반대중에게 현대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을까? 중앙 언론·방송의 기자단은 광주비엔날레 행사를 지역행사로 봤기 때문에 소극적 태도는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 언론·방송기자의 적극적인 보도로 광주발 기사들은 중앙기자를 움직이기 시작해 전국적으로 보도가 확대됐다. 다시 말해 지역기자단의 광주비엔날레의 적극적인 보도는 중앙기자단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의 전국 홍보에 지역기자단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홍보에 힘입은 광주비엔날레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람객이 줄을 이었다. 미술계의 주요인사에서부터 대학생, 호기심에 찾아온 일반관람객, 미술애호가, 특히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소풍의 길목이 됐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전시장 입구는 매일 관람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입장을 위한 줄에 100여명 이상이 대기했고, 장관을 이룰 정도였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단일 현대미술전에 이처럼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 모은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다시 이루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밀려오는 관람객에 조직위에서는 난해한 현대미술의 이해를 돕고 안내할 수 있는 도우미 서비스가 필요했으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반 관람객에게는 시간을 정해 급조된 도우미 서비스가 제공됐다. 주요내빈의 안내는 불가피하게 학예사인 필자가 맡았다. 덕분에 매일 오전과 오후를 나눠 평균 2∼3회를 확성기도 없이 육성으로 1전시장부터 5전시장까지 안내를 해야 했다. 매번 전시장 입구에서 내빈 5∼10명으로 안내를 시작하면 시간이 지닐수록 인원이 증가해 100여명의 일반관람객까지 5전시장 출구를 빠져나왔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퇴근 무렵에는 목이 부었다.
당시 ‘문공위’ 국회의원도 2차례로 나누어 방문했다. 필자는 안내 도중 국회에서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강조했다. 힘들었지만 보람차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광주비엔날레는 2개월의 전시 기간을 마치고 광주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으며, 감동의 역사 장을 기록했다.
5. 안티비엔날레와 제2회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개최 선언을 했던 1994년 11월경, 광주시민들과 예술인, 언론의 우려 섞인 시각을 불식하고 그분들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곧 이은 1994년 말, 광주비엔날레 창설 관련 국제심포지엄 행사장은 일부 진보미술인의 반대 시위로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임영방(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장·국립현대미술관장)이 갑자기 사의를 표명하는 등 비엔날레조직위는 힘들었던 시기였다. 앞서 밝혔듯이 한국 작가 발표 이후 광주비엔날레 개최 반대의 목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광주지역의 진보미술단체(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에서는 꾸준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정치적 의도와 준비의 졸속성, 시민참여 배제, 광주정신의 미학적 구현의 훼손, 행정 관료의 무자비한 추진 등 광주비엔날레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이러한 문제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엔날레 기간 ‘안티비엔날레-통일미술제’를 통해 문제의식을 표출했다.
행사는 광주오월 망월동 입구 4km의 길목 양편에 1000개의 만장을 설치하고 망월동 묘역에서 진행됐다. 본 전시는 개막 보름 만에 2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 이상의 파급효과를 발휘했다. 전시의 주관단체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이지만 개인과 단체의 적지 않은 성금과 전국 재야인사로 ‘통일미술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안티비엔날레는 어찌 됐든 광주를 상호 보완하는 쌍두마차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1회 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직위는 약간의 휴식과 함께 2회 비엔날레 준비에 다시 돌입한다. 그리고 ‘안티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주관했던 중심적 인사 A씨는 광주시립미술관장과 광주비엔날레 사무처장을 겸직하면서 제2회 광주비엔날레를 주도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3. 광주비엔날레, 꿈을 성공으로 쓰다
1995년 9월 20일, 드디어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로 개막했다. 감동의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개막 전날 비엔날레 설치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심사한 결과를 발표하는 시상식이 있었다. 대상수상자로는 예상을 깨고 흑인작가 ‘크초’(쿠바)로 선정됐고 그의 이름이 발표되자, ‘크초’는 개막식장 어느 구석에서 한참 만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상식장에 올랐다. 곧 그는 감동의 눈물을 쏟으며 대상 상패와 상금20,000$을 받았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알렉시스 레이바 크초의 ‘잊어 버리기 위하여’(1995)를 관람하고 있는 내외빈들.
우리 비엔날레 조직위에서는 OB광주공장에 협조를 구해 맥주병을 확보하고 낡은 배는 수소문해 제2수원지에서 저수지 관리용 낡은 배를 구해 두었다. ‘크초’는 빈 병으로 쿠바지도를 만들었고 그 위에 낡은 배를 올려두고 호주머니에서 쿠바 지도를 작품 앞 벽에 붙였다. 그게 그의 작품 전부이다. 작품은 현재까지 광주비엔날레에서 보관 중이다.
그리고 전시 기간 전시장 입장을 위해 늘어선 줄이 장관을 이뤘다. 현대미술을 접하지 못했던 학생, 일반인을 비롯해 특히 어르신은 설치 영상 작품을 보면서 “무슨 쓰레기를 모아뒀다”, “이게 세계현대미술이라고?” 반응하며 신기해 했다. 특히 대상을 수상한 ‘크초’의 작품 앞에서는 황당해 하면서 “이러한 작품은 나도 만들겠다”며 웃었다. 관람객은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관람한 것이다.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관람자의 눈높이에서의 해석은 즐겁고 신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2번 3번 자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나름의 감상법과 분석력이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전시 기간 관람객은 163만명으로 공식 집계 됐다. 전 세계에서 현대미술전에 이렇게 많은 관람객을 동원한 사례는 없었다. 비엔날레 조직위에서도 개막이 다가오면서 입장권 예약과 단체관람객 예약을 확인받으면서 설마가 현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광주비엔날레 성공적 개최’란 눈물 어린 감동의 신화를 우리는 성공이라는 단어로 일궈 낸 것이다. 모두 광주시민의 문화의식, 헌신적인 자원봉사자, 그리고 광주시와 조직위원회 직원 모두의 열정으로 이룬 결과인 셈이다. 특히 당시 홍보에 적극적인 노력을 다해준 지역 언론사에 감사를 전하고 싶다.

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회가 1995년 4월22일 한국 참여작가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모습.
4. 동료직원의 순직과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람객
필자가 근무하던 전시부의 마주 보는 책상에는 북구청에서 파견 나온 K씨(행정6급)가 있었다. K씨 업무는 참여작가, 초청자 여행일정 관리와 숙소 배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준비 기간에는 다소간 여유가 있는 업무를 맡았으나 개막 D-30일부터는 바쁘기 시작해 D-7일 부터는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었다. 작가와 초청자 약 200여명이 한꺼번에 K씨에게 몰린 것이다. 작가들의 여행일정 변경, 숙소 변경이 연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물론 사전에 일정을 조정하고 숙소를 배치했지만 계획과 현실의 상황은 늘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자유 분방한 예술인을 상대하는 일에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때가 많다.
필자는 그에게 행정업무의 도움을 많이 받는 터이고 선배인지라 가깝게 지냈다. “선배님은 건강도 좋지 못한데 비엔날레 파견을 자청하셨나요?”라고 묻자, K씨는 “건강이 좋지 못하지만 무리해서라도 파견 신청을 한 것은 5급 사무관으로 정년을 하고 싶어서네. 그래야 묘비에 ‘학생부군신위’가 아닌 ‘사무관부군신위’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K씨는 과도한 격무에 개막 3일 후 과로사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망월묘역에 모시는데 우리 직원 모두는 눈물로 그를 보내드리고 결국은 순직으로 인정받아 사무관으로 승진이 됐다.
전시장과 중외공원에 배치된 많은 자원봉사자의 눈부신 활동은 밀려오는 관람객을 안내 하는데 어려움은 있었지만 비엔날레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과 책임감으로 하나가 돼 있었다. 비엔날레조직위는 이러한 자원봉사자들과 광주시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전시장 내에 다양한 설치 영상 작품관리는 힘든 일이었으나 별일 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모두 자원봉사자의 섬세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당시 국회문공위 의원들에게 전시를 설명하는 필자.
홍보에 힘입은 광주비엔날레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람객이 줄을 이었다. 미술계의 주요인사에서부터 대학생, 호기심에 찾아온 일반관람객, 미술애호가, 특히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소풍의 길목이 됐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전시장 입구는 매일 관람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입장을 위한 줄에 100여명 이상이 대기했고, 장관을 이룰 정도였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단일 현대미술전에 이처럼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 모은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다시 이루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국제 미술전에 출품된 임옥상 작품.
당시 ‘문공위’ 국회의원도 2차례로 나누어 방문했다. 필자는 안내 도중 국회에서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강조했다. 힘들었지만 보람차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광주비엔날레는 2개월의 전시 기간을 마치고 광주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으며, 감동의 역사 장을 기록했다.
5. 안티비엔날레와 제2회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개최 선언을 했던 1994년 11월경, 광주시민들과 예술인, 언론의 우려 섞인 시각을 불식하고 그분들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곧 이은 1994년 말, 광주비엔날레 창설 관련 국제심포지엄 행사장은 일부 진보미술인의 반대 시위로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임영방(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장·국립현대미술관장)이 갑자기 사의를 표명하는 등 비엔날레조직위는 힘들었던 시기였다. 앞서 밝혔듯이 한국 작가 발표 이후 광주비엔날레 개최 반대의 목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광주지역의 진보미술단체(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에서는 꾸준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정치적 의도와 준비의 졸속성, 시민참여 배제, 광주정신의 미학적 구현의 훼손, 행정 관료의 무자비한 추진 등 광주비엔날레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이러한 문제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엔날레 기간 ‘안티비엔날레-통일미술제’를 통해 문제의식을 표출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게 된 국내 작가들.(앞줄 왼쪽 신경호 전남대 전 교수 임옥상 작가, 두번째줄 왼쪽 홍성담 작가, 왼쪽 세번째 본전시 한국작가 선정 큐레이터 유홍준, 맨 뒷줄 가운데 우제길 작가)
1회 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직위는 약간의 휴식과 함께 2회 비엔날레 준비에 다시 돌입한다. 그리고 ‘안티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주관했던 중심적 인사 A씨는 광주시립미술관장과 광주비엔날레 사무처장을 겸직하면서 제2회 광주비엔날레를 주도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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