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별세
미쓰비시중공업서 고된 노동·부상
생존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일’
생존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일’
입력 : 2024. 10. 06(일)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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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동원된 근로정신대 생존 피해자는 양금덕 할머니 한 명만 남게 됐다.
6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였던 김성주 할머니가 전날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1929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4세인 1944년 5월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공장에 강제 동원됐다.
당시 김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 선생의 권유와 강압으로 친구들과 함께 일본행에 나섰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일본 현지에 도착하자 철판을 자르는 선반 일에 투입됐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굶주림과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강요받던 김 할머니는 작업 중 왼쪽 검지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44년 12월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 당시에는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의해 발목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강제 동원된 김 할머니의 고통을 끝나지 않았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사회적 낙인이 찍혔고, 결혼해서도 남편으로부터 온갖 인신모욕과 구박을 듣는 등 평온한 생활을 가져 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정신대’라고 하면 모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잘못 알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 할머니는 지난 2008년 양금덕 할머니 등과 소송에 나섰지만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기각돼 패소했다.
이후 시민모임 등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12년 10월 일본 소송 원고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년여 만인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빌미로 2019년 한국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취하면서 한일 간 외교적 마찰이 시작됐다.
또 일본 정부의 압력과 방해에 의해 미쓰비시 측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자, 원고 측은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단행했다. 김 할머니도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구실로 지난해 3월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김 할머니는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해 울분을 토했다.
그러다 김 할머니는 여러 이유로 기존 입장을 바꿨고, 지난해 5월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함과 동시에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압류도 취하했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도 안양시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7일 오후 1시다.
한편, 이날 기준 대법원 확정판결로 종결된 사건 이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난 2019년과 2020년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인 사건 원고 87명, 15건 소송 중 생존자는 정신영 할머니 외 1명 뿐이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동원된 근로정신대 생존 피해자는 양금덕 할머니 한 명만 남게 됐다.
6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였던 김성주 할머니가 전날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1929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4세인 1944년 5월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공장에 강제 동원됐다.
당시 김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 선생의 권유와 강압으로 친구들과 함께 일본행에 나섰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일본 현지에 도착하자 철판을 자르는 선반 일에 투입됐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굶주림과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강요받던 김 할머니는 작업 중 왼쪽 검지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44년 12월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 당시에는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의해 발목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강제 동원된 김 할머니의 고통을 끝나지 않았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사회적 낙인이 찍혔고, 결혼해서도 남편으로부터 온갖 인신모욕과 구박을 듣는 등 평온한 생활을 가져 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정신대’라고 하면 모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잘못 알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 할머니는 지난 2008년 양금덕 할머니 등과 소송에 나섰지만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기각돼 패소했다.
이후 시민모임 등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12년 10월 일본 소송 원고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년여 만인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빌미로 2019년 한국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취하면서 한일 간 외교적 마찰이 시작됐다.
또 일본 정부의 압력과 방해에 의해 미쓰비시 측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자, 원고 측은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단행했다. 김 할머니도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구실로 지난해 3월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김 할머니는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해 울분을 토했다.
그러다 김 할머니는 여러 이유로 기존 입장을 바꿨고, 지난해 5월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함과 동시에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압류도 취하했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도 안양시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7일 오후 1시다.
한편, 이날 기준 대법원 확정판결로 종결된 사건 이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난 2019년과 2020년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인 사건 원고 87명, 15건 소송 중 생존자는 정신영 할머니 외 1명 뿐이다.
윤용성 기자 yo1404@gwangna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