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성보박물관장을 역임한 송천의 8m 규모의 성모마리아 작품으로 통하는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내 길을 떠난 적이 없다’를 관람하고 있는 관람객들 모습.

“너무 급격한 단절과 변화였거든요. …바로 처형될 수 있었거든요.”

이는 지난 8월17일 개막돼 오는 10월20일까지 을숙도 소재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어둠에서 보기’라는 주제로 36개국 62작가·팀(78명)이 출품된 가운데 부산근현대역사관과 한성 1918, 초량재 등지에서 함께 열리고 있는 올 부산비엔날레(예술감독 베라 메이&팔립 피로트) 주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의 2층 전시장에서 만난 한멍 윈의 ‘밤의 수트라’라는 작품 모니터에 새겨진 문구다. 아픔의 시간들을 기록한 이 작품은 모니터와 직물이 걸쳐져 있고, 관람객들이 앉아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 명제인 ‘수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밤과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작가의 첫 장편 영화로 꼽힌다. 여성의 노동과 보편적인 고통, 공유된 초문화적 유산, 종교 및 문학에서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 상호 교차성을 탐구한다는 설명이다.

작가는 이런 사례들을 수집하기 위해 중국 구이저성의 한 마을에서부터 캄보디아의 프놈펜과 시엠립, 영국 런던, 스위스 브베 등 네곳에서 필요한 영상을 담아냈다. 영상에는 망명과 디아스포라, 회복 및 반란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론으로 여성 존재의 고통을 기록해내고 있다.

한멍 윈 작 ‘밤의 수트라’와 홍진훤의 ‘클리치 바리케이드’ 등이 전시된 2층 전시장 전경.

지하 1층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요코 테라우치의 ‘판게아’

이처럼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어둠의 역사와 유산, 공간들을 예술적으로 조명한다. 약탈이나 노동자 탄압, 독립운동, 쌀값 폭등과 농민봉기, 난파와 해방, 북파공작원 등 여전히 미완이자 현실적인 문제들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인류의 위기 등 환경에 대한 언급이 비교적 낮은 이유다. 의도적 회피를 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둠에서 보기’라는 주제가 불교적 색채를 도출하고 있더라도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한정적 주제로 다양한 시각을 융복합 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올해 지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다양한 실험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어떤 특별 전시 같은 느낌이 농후한 점 또한 주제의식을 배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전시장은 지하(전시실 1∼3, 1층(전시실 4), 2층(전시실 5) 등 3개층에 걸쳐 작품이 펼쳐져 있다. 초창기 해운대 일대와 부산시립미술관 등지에서 열리던 부산비엔날레를 기억하던 필자로서는 현시대 최첨단 미술실험의 장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특정 미술관의 특별전 같은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지하의 금고미술관 전경

금고미술관의 4금고 모습

이에 앞서 1층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윤석남의 작품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시리즈’는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 63점의 초상을 선보이는 작품으로 역사 왜곡이 심해진 현세태에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 중 하나였다. 또 송천의 ‘견보탑품:통도사 영산전 벽화 모사’는 보물 제1826호 영산전과 보물 제1711호 영산전 벽화에 대한 이미지 재현과 복제가 가지는 전복적 의미를 구현해내 전시 주제에 부합시키고자 했다. 이외에 8m 규모의 성모마리아 작품으로 통하는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내 길을 떠난 적이 없다’를 출품했다. 송천은 불교미술 전문가로 통도사 성보박물관장을 역임한 스님이다. 스님 작가로 출품 전 이목을 집중시켰다.

타링 파디의 ‘메메디 사와·허수아비’는 올해 인도네시아 총선 이후 폭등한 쌀값으로 인한 이슈를 다루고 있으며, 홍진훤의 ‘클리치 바리케이드’는 2004년 2월 현대중공업의 한 하청 노동자가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전반적 시국사건들이 사진물로 부착돼 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역시 상기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바리케이드는 군부독재 시절 통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대의 부조리 상징물이다. 작가는 2024년 진정으로 세워야 할 바리케이드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한성1918 전경

부산 동매산 학살지 흔적을 찾아 한참을 헤매던 작가가 한국전쟁 당시 부산형무소 재소자 중 최소 160여명이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그곳에서 쓰러져 간 희생자들의 피 얼룩 위로 번져갔을 꽃과 풀을 떠올리게 하는 김경화의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과 ‘수장된 사람들’ 및 ‘조율’ 역시 눈길을 붙잡았다.

지하 1층 전시장에서는 가장자리에 아크릴 물감을 칠한 화지에 일정한 크기의 구멍들이 곡선 주기를 따라 펼쳐지면서 마치 하얀 원형 종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착각에 들게 한 요코 테라우치의 ‘판게아’는 붉은 색감 위에 하얀 구멍의 질서정연한 배열을 통해 또 다른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는 곧 하나다’는 저자의 시문이 부착돼 있는 데, 우주를 분할한다는 의미로 일정 흐름의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외에 미술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한 작가로 인도와 파키스탄, 네팔, 조지아, 태국 등 전세계를 방랑하며 작업을 펼쳐온 이두원의 야외에 있는 카라반을 통해 소우주를 표현한 ‘The flower garden of BUDDHA-BEE in a caravan’ 역시 불교적 세계관과 연결돼 있다. 앙증맞은 카라반 밖은 부처가 된 벌이 날아다니고, 내부를 식물로 가득한 콘셉트로 꾸며져 있다.

또 다른 전시 장소인 부산근현대역사관 지하의 금고미술관은 미발행 화폐를 보관했던 장소인데 5금고까지 있는 그곳에 이양희의 ‘해일’ 등 각 금고장소마다 작품을 설치했다. 5금고의 빛과 그림자의 복잡 미묘한 작용을 탐색한 셰이크 은디아에의 ‘르 파리’ 작품이나 구헌주 작가의 ‘무궁화 해적단’ 일부 역시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한성1918 사이 인도바닥에 안내이정표 도색은 타지 관람객들의 동선 파악에 도움을 줬다.

이밖에 1918년 한성은행 부산지점으로 40년간 유지됐으며 철거 위기에 내몰렸으나 부산시민들의 반대로 원형이 보존된 한성 1918에서의 작품 니카 두브로브스키의 ‘보이는 의회’, 초량의 2층 단독 주택인 초량재의 김지평의 ‘디바-고스’와 ‘디바-할머니’, ‘군인들’ 등도 주목되는 작품들이었다.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특정한 사회이슈들을 다룬 작품들과 개성어린 공간에서의 작품 전시는 눈에 띄웠으나 참여작가들이 교사, 악기 제작자, 의사, 종교인 등 각양각층이 참여했는데도 해적 계몽주의와 불교적 깨달음 사이 상호연관성을 하나의 틀로 묶어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약해보였다.

여기다 각 전시공간의 유기적 연관성이 떨어졌으며, 하나의 주제로 끝까지 그 주제의식이 지배했어야 하는 데 그게 조금 취약하다보니 오히려 몰입감에 장애로 작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타지 관람객 입장에서 부산비엔날레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