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문화수도’나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는 우리 지역 스스로가 설정한 지향점이었다. 애초부터 타 시도나 중앙정부가 이를 인정하고 공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딱히 내세울 수 있는 게 없어서 ‘문화’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여러 가지 이유로 광주가 수도권과 영남권에 비해 발전이 더디다 보니 ‘콘서트 전용 홀’ 한곳이 없을 정도로 문화 관련 인프라가 열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나라나 도시에서 국공립 예술단체를 운영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우리나라 70, 80년대처럼 국가와 사회 전체가 오로지 경제개발에만 몰입하던 시절,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문화 향유권’을 보장해주고자 하는 정책적인 배려로서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 국악단, 극단 등을 만들고 국가나 지자체에서 그 운영비용을 감당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그곳의 국공립 예술단체 외에는 딱히 그 정도 수준의 공연을 제공해줄 만한 다른 예술단체 등이 없었던 시절이었고 한마디로 ‘시립예술단’은 대체 불가의 독점적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취지로 운영돼 오던 국공립예술단체들은 한국이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내고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보기 시작하자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직면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부자 동네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본인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예술단체에 대한 기대 수준을 가차 없이 높이기 시작했다. 결국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부터 예술단체의 질적 성장을 위해 꺼내든 비장의 카드 바로 예술단체 ‘법인화’가 추진됐고 단원(노조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예술단체 단원들은 “본인들의 안정적 고용이 위협받는다, 법인화 이후에는 지자체가 운영비용을 줄이기 시작할 것이고 재정자립도 향상을 위해 불가피하게 늘어나는 공연 횟수는 공연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며 티켓의 가격이 올라가는 등 모든 피해가 결국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예술단체의 법인화 과정에서 대부분 고용 승계가 이루어졌으며 국내외적으로 경쟁적 환경이 조성되면서 공연의 질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시민들은 올라가기 시작한 입장권의 가격을 자연스럽게 감수하기 시작했고 당초 우려와는 달리 지자체로부터의 전입금은 법인화 이전보다 오히려 증가하는 등 예상외의 전개가 펼쳐졌다. 숭고한 문화 예술 분야에 무식하게 ‘시장경쟁논리’를 들이대는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다. 물론 아직도 국공립 예술단체의 법인화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그중에는 사실도 있고 의견도 있고 지어낸 이야기들도 있는 것 같다. ‘사실’과 ‘의견’조차 구분되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다.

국가나 지자체가 국공립 예술단체를 유지하는 또 다른 한 가지의 경우가 있다. 오케스트라 분야를 한 예(例)로 들자면 네덜란드의 ‘로열 콘세르트 허바우’(Royal Concertgebou Orchestra)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처럼 국격(國格)을 올려줄 만한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수준일 때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그 운영비용 전체를 기꺼이 책임진다. 그러니까 이 오케스트라들이 선택된 정확한 이유는 그 나라나 도시에도 이미 수많은 프로 오케스트라가 있기는 하지만 워낙 압도적 우위의 연주력을 바탕으로 비교 불가의 ‘수준’ 차이를 보이는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전 세계에서 국공립 예술단체를 운영하는 이유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는 해당이 돼야만 지금까지처럼 시민들은 시립예술단체의 존속을 지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 지역에는 모든 예술 장르에 걸쳐 엄청나게 많은 프리랜서 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매일같이 수많은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공연들은 시립예술단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고정수입이 없는 이들의 만성적인 생활고다. 아마도 지역 제도권 울타리 밖 예술인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늦게 태어난 게 죄냐? 기회만 준다면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우리도 세금 내는 시민들이다. 시립예술단만을 위한 차별적, 시혜적 정책을 그만두고 공평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라!”

이런 판에 아직도 지역에서 오로지 ‘광주시립예술단’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시립예술단체의 획기적 수준 향상뿐이고 이것만이 미래 모두의 평화로운 공존이 담보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의 지방 시립 예술단체의 미래에 대한 필자의 솔직한 견해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 결국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운영방식의 대폭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한다. 예술단체의 획기적 개혁과 질적 성장을 위한 사실상 최선의 선택지가 ‘법인화’라는 것은 이미 세계 학계와 업계의 통설이다. 불편한 진실이라 누구도 먼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시간은 좀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응답하라 1988’의 시대가 아니다. 이제 누구라도 본인의 휴대폰 하나로 자기 동네 예술단체의 수준을 세계 수준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