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절벽, 지방소멸의 위기가 닥쳐오는 가운데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출생률 제고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반증하듯 각 지자체마다 경쟁하듯 내놓는 출산 장려 정책들, 특히 각종 지원금과 돌봄 사업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딱히 지원책에 의지해 임신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임신부가 되고 보니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아주 많이 느낀다. 더 정확히는 정책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월10일이 ‘임산부의 날’이었다고 하는데, 정부가 2005년 임신부에 대한 인식 제고와 배려문화를 향상하기 위해 지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 의문이다. 심지어 필자는 임신부 당사자 임에도 잘 몰랐다. 반면에 임산부의 날은 잘 몰라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가장 출생률이 낮은 국가라는 통계는 진부할 만큼 익숙할 것이다.

광주시는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광주’를 만들겠다고 한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현 세대와 미래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도시다. 그러므로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실제 정책의 수요자가 체감할 수 있는 정책, 보다 섬세하고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말 그대로라면, 우선은 아이를 낳아야 키울 수 있지 않겠는가. 출산과 육아 전에 임신부로서 겪어야할 과정에서의 고비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이다. 특히 임신 중 발생하는 자연유산의 80%이상이 임신 12주 이내에 발생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임신 초기의 안정은 중요하다. 그런데 대다수가 맞벌이 부부인 요즘 같은 때에 임신초기라고 해서 사회활동이나 경제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기에 이동은 당연한 부분이고, 자가용 운전자가 아닌 이상 대중교통 이용을 피할 수 없다.

광주시의 임신·출산장려 정책 중 교통 관련 정책을 살펴보니 도시철도 운임면제 정책이 전부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임신부들에게는 운임을 면제해주는 것도 큰 혜택이다. 그렇지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직장인 임신부들에게는 운임 면제보다는 임신부에게 친절한 교통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더구나 광주시의 경우 도시철도 2호선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도시철도 1호선이 지나지 않는 구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에 대한 정책 마련과 이미 있는 정책에 대한 모니터링이 시급하다.

솔직히 말하면 출퇴근 시 시내버스 이용은 늘 불편했지만, 임신부가 된 후로 출퇴근길이 더욱 불편하고 불안해졌다. 일반적인 출퇴근 시간을 피할 수 있는 단축근무제도가 있긴 하나, 고작 12주까지이다. 물론 그마저도 출퇴근 시간을 피했다고 해서 임산부 배려석이 늘 비어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임신 초기와 중기까지는 임신부로서 외형상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는 보건소에서 받은 임신부 뱃지를 가방에 달고 다니는 것 외에 임신부임을 증명할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임산부 뱃지가 있다고 해서 임신부 배려석을 양보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보건소에서 임신부 뱃지를 받았을 때 뭔가 든든한 보증서 같은 게 생긴 느낌이었다. 이 뱃지만 있으면 적어도 임신부 배려석에 당당히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랄까. 하지만 임산부 뱃지를 달고, 처음으로 버스를 타던 날 그 자신감은 산산 조각났다. 슬프게도 임산부 뱃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함을 경험하면서,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뱃지가 한 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혹시라도 “티도 안 나는데 임신부가 맞느냐” , “임신부 배려석을 양보하는 건 의무가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느냐”라는 대답이 돌아와 버스 안에서 일어날 소란이 두려웠다. 결국 급정거하기 일쑤인 퇴근길 버스를 한 시간 가까이 타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던 필자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에서 하차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엄청난 무기력감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처음엔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 승객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한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초·중기 임신부들에게도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을 경우에는 그저 일반 여성으로 생각하기 쉬울 테고, 임신부 뱃지 역시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필자도 임신부가 되기 전까지는 그 뱃지를 허투루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뒤로도 한 번도 임신부 배려석을 양보 받은 적은 없으니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임신부 배려석이 아닌가. 말로만 임신부 배려 문화를 실천하자고 하지 말고 좀 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알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시민들의 의식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서울시는 관내 거주하는 모든 임신부에게 1인당 70만원의 교통비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신용카드, 체크카드에 교통포인트로 지급되며 대중교통 및 택시 이용 시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을 시작으로 타 지자체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책들이 시행된다면, 우리 광주시는 여기에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시내버스 승차 시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인식했을 때 나오는 “반갑습니다”와 같은 음성멘트처럼 “임신부를 배려해주세요”라는 멘트도 나온다면 참 좋겠다. 금전적인 지원이 어렵다면 임신부 전용 버스카드를 발급해 단말기 인식 시 음성멘트 기능을 탑재하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요즘은 시내버스 내부에 안내전광판이 설치돼 다음정류장을 안내하기도 하고, 광고나 캠페인이 나오기도 한다. 이어폰을 꽂고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많은 만큼 내부 전광판에 “핑크색 뱃지가 보이면 자리를 양보해주세요” 이런 문구를 주기적으로 홍보한다면 적어도 임신부 뱃지가 무엇인지는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임신부 배려석에 앉기 전에 주위에 임신부가 서 있지 않은지 둘러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