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국민학생 때였다. 매달마다 학교에 내야 하는 돈이 있었다. 이른바 ‘육성회비’라는 것으로, 그 이전에는 월사금(月謝金)이라고도 불렸던, 일종의 수업료였다. 의무교육이 실시되기 전이었으니,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이 씌어진 황토색 봉투를 받았는데 겉면에는 납부해야 할 달(月)과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함께 배치된 표가 그려져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수업 못지않게 육성회비 납부 실적을 파악하는 데 열정을 보이셨다. 수업 전 육성회비 미납자와의 면담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는데, 돈을 제때 내지 못한 아이들은 매일 감당하기 힘든 욕을 견뎌야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호명을 당한 아이들은 매번 똑같았다. 심지어 한 달이 아니고 몇 달씩 밀린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열패감으로 고개부터 숙였다. 불편한 자리를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일 육성회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시원하게 해줄 친구는 거의 없었다.

지·덕·체보다 회계나 경영에 더 관심이 높은 담임 선생님은 칠판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거나 회초리를 들었고, 아예 수업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선생님은 당장 육성회비를 가져오라며 집으로 떠밀었는데 학생 입장에서는 그렇게 부모님에게 간들 없는 돈이 나올 리가 만무했기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허투루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엄마가 물색없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어찌할 바를 몰라 꺼이꺼이 서러운 눈물만 흘린 친구도 있었다.

가장 부러운 대상은 당연히 부잣집 친구였다. 그의 황토색 봉투는 화려한 문신처럼 새파란 도장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봉투에 찍힌 도장을 보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들을 발견하곤 했다.

결핍의 시대라고도 한다. 부모님도, 우리도 가난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때였다. 당시에는 ‘입에 풀칠하는 일’이 우선 가치였다. 대부분 가난했기에 우리의 누나와 형 중 누군가는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위해 상업고등학교를 가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성공을 위해서는 배경이나 학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세상에 부조리는 많았지만 ‘수사반장’이 있기에 나쁜 놈들은 모두 감방에 갈 것이라고 믿었다. 수사반장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고, 그도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담임선생님에게 떠밀리고, 엄마의 몽둥이에 쫓기면서 슬픔을 삼켰던 친구들이 부모가 되면서 세상도 바뀌었다.

풍요의 시대라고 한다. 과학의 급격한 발전은 세계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으며 각 분야 마다 ‘홍수 사태’를 빚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외적 환경 변화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인식과 가치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오늘을 사는 부모들은 할 일이 많아졌다. 손에는 몽둥이 대신 볼펜이 쥐어졌다. 자녀의 학업과 진학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학원을 보내기 위해 지금보다 조금 더 벌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부모의 땀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한정식 가게에서나 나올법한 금수저와 은수저, 외국의 궁전 이름 같은 SKY캐슬 따위가 등장하면 무릎이 꺾이는 열패감을 경험해야 한다.

공정과 상식이 중요한 가치라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공정과 상식이 강조될 때마다 차별과 특권이 두드러진다. 편법적이고 부도덕한 방법을 동원한 자녀의 경력 쌓기를 비롯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다른 이들이 가져야 할 권리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 놀라운 지점은 상식과 공정을 무너뜨린 이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도 당당하다는 데 있다. 옳고 그름의 세상 이치를 체계적으로 익히는 학생에게 보여서는 안될 비도덕적 방법과 수단을 이용하고도 ‘내 새끼’ 일이라면 눈을 감는다.

수업시간인데도 육성회비를 가져오라고 등을 떠미는 선생이나 금수저를 앞세워 남의 새끼 숟가락 뺏는 특권층의 행태를 비교할 때 차이점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으로는 감성과 창의력, 상상력이 핵심 역량인 시대라고 떠들면서도 정작 정신 수준은 지난 세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드라마 SKY캐슬에 등장하는 대사 한 문장.

“세상이 왜 피라미드야. 지구는 둥근데 왜 피라미드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