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2022년 봄입니다. 오랜만에 광주의 관객분들과 만납니다. 기쁘고 즐겁고 설레는 하루하루입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세상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깊은 탄식과 울분이 가시질 않습니다. 뉴스를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제 자신이 괴롭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문예회관 연습장 가는 길목에서 고정희 시인의 시비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만났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이 시절에 뭔 말이 더 필요합니까.”

이는 지난 4월22일 금요일 오후 광주문예회관을 찾아 모처럼 연극 한편을 접하는 호사를 누렸는데, 거기서 만난 연출가의 글 중 일부다. 광주시립극단 제18회 정기공연인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4월21∼23일 소극장)의 연출가 박근형 한예종 연극원 연출과 교수가 밝힌 연출의 변이다. 보통 연출의 변이 이처럼 섬뜩하게 다가온 적은 드물다. 심지어는 5·18을 형상화한 뮤지컬이나 미술판, 문학판의 수많은 현장에서도 이렇게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모든 공연과 전시, 문학제 같은 행사들이 예술인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박 연출가의 글 행간에서 2022년의 시대적 키워드를 다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특정인의 글에서 그 글이 갖는 위력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본 단상이었던가 자문도 해 봤다.

더욱이 문화판에서 박 연출가와 인연을 맺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에 친분 관계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끼어들 개연성은 없다. 그냥 그가 정리해 놓은 글에서 시대를 솔직담백하게 읽어내는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었기에 좋았던 것이다. 나중에 박근형이라는 분이 연극 연출 분야 ‘믿보잡’(믿고 보고 잡아도 되는)을 해도 후회하지 않을, 연출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의 말인즉슨 광주 관객을 만나기 때문에 설레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지만, 세상은 그와는 반대로 깊은 탄식과 울분이 가시지 않는데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의미로 읽혀졌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이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사월은 역사의 변곡점이 깃든 시간들이다. 4·3 제주 항쟁과 4·16 참사, 4·19 의거 등이 있어서다. 바로 이어 오월에는 5·18민중항쟁의 서사가 있다. 여하튼 사월과 오월은 굵직하게 굴곡진 역사의 생채기가 새겨져 있다. 여기다 얼마전 끝난 대선 결과로 인한 생채기(지지자에 따라 다르겠지만)로 그것을 수습하느라 마음 고생도 있었겠다.

또 실제 이 연극은 군인이라고 하는 이 시대 청년들을 연극의 주테마로 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청년의 시간은 우울해졌다. 변변한 직장 하나 잡기 어려운 세상이 열리면서 이 시대 청년들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오죽하면 청년의 고독사 소식까지 들려올까 마는. 그래서 시대가 거꾸로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시대적 고민이 투영된 게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였다. 물론 5·18만 생각하면 일부 군인놈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시대로 한정하지 않으면, 우리네 귀한 아들들이 아닌가. 이 귀한 아들들에게 기성세대들은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닌가 묻고 싶다.

박 연출가는 전남 해남 출생 고정희 시인(1948∼1991)이 자신에게 말한다고 밝혔다. “정신 바짝 차리고 지금을 기억하라고.” 이 글귀가 깊이 꽂히는 것은 혼탁한 세상처럼 문화판이 지속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올 1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재단 초대 이사장과 초대 사장 선임 건으로 80여곳의 문화단체 성명이 잇따르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문화판의 설득력을 전혀 얻지 못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역 문화판은 늘 인사잡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그날 관객석이 어느 정도 차는 것을 보고 ‘코로나 엔데믹 시대가 성큼 다가왔구나’가 새삼 실감됐다. 이는 코로나 이전의 문화생태계가 복원되고 있어 반갑지만, 복원되면서 인사 잡음 등 또 수많은 오류들도 함께 복원될까 봐 5·18항쟁 42주년을 맞는 오월 첫날, 걱정부터 앞선다. 이날 접한 연극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