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요즘 전 세계적으로 K-콘텐츠가 유행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오징어게임’의 스토리에 스며있는 한국인의 시각과 관점에 전 지구인이 동감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몇몇 외신들은 서구인들이 한류 콘텐츠에 매료되는 이유를 “자신들은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한국인만큼은 집요하리만치 문제를 끄집어내고 들추어내는 데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대하고 나니 세월이 주는 망각에도 기억의 주름을 뚫고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10여 년 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다. 이 지독한 리얼리즘의 영화에는 ‘미자’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60대 여성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뒤늦게나마 시를 쓰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미자’는 사회 현실이 던져주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에 무너지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 작품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특별히 더 생각나는 대목은 ‘미자’가 혼자서 생활이 어려운 노인의 집을 찾아가 방문 돌봄을 하며 겪게 된 일이다. 성심껏 돌보던 노인에게서 ‘미자’는 신체 접촉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으며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사실 ‘미자’의 이러한 경험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현재 돌봄서비스 종사자의 90%는 여성으로 보건복지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노인돌봄서비스 종사자 중 열에 아홉은 ‘서비스 제공 중에 성희롱 또는 성추행을 경험한 바 있다’고 답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안타까운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상대를 소중한 인권을 지닌 사람으로 존중해 주려는 자세와 태도가 결여된 것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농담과 행동은 괜찮겠지”, “장난일 뿐이잖아”라는 생각이 누군가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까지로 커져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시도 지난 7월 15일 어르신특별주간을 맞아 가졌던 ‘노인맞춤돌봄 종사자 간담회’때 나온 몇 가지 사례 중 영화에서 ‘미자’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종사자들의 고충을 듣게 되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에, 노인맞춤돌봄 종사자들을 위해 업무 중 발생하는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은 물론 발생 시 대응조치와 사후관리까지 일련의 과정 모두를 통괄하는 장치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우리시는 관련 테스크포스팀을 꾸렸고 현장의 목소리와 실제 사례를 종합해 각 상황별로 적용할 수 있는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성폭력 예방 및 대응 매뉴얼’을 제작했다.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며, 전국 최초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이 매뉴얼에는 먼저 종사자와 이용자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사전교육과 홍보 등 예방대책을 담았고, 실제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각 단계별, 기관별 역할을 포함한 대응체계도 포함시켰다. 아울러 사건 종결 이후에도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피해자와 가해자의 근황을 살피고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가능토록 하는 사후조치 방안도 함께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매뉴얼의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성폭력 분야의 전담인력을 (재)광주시 사회서비스원에 배치해 예방대책-대응조치-사후관리 등의 사이클을 안정적으로 추진해 나아갈 계획이다.

우리 모두는 소중한 사회구성원이다. 특히 노인맞춤돌봄 종사자의 업무처럼 다른 사람의 가정을 찾아가 그들을 돌보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1인가구가 늘어가고 노후를 지역사회에서 지내며 일상을 영위하고 싶다는 의견이 여전히 많은 점을 고려할 때 이제는 반드시 이런 구태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일부의 사람들이 돌봄노동을 허드렛일로 보고, 종사자를 인격적으로 낮추어 바라보며 선을 넘는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만큼 이 매뉴얼을 통해 우리사회가 더욱 진일보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