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시론] 2015년에 79세로 세상을 떠난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학교 명예교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작으로 오래 기억될 학자이다. 앤더슨 교수는 1936년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영국계 아일랜드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하며 케임브리지대에서 석사를,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코넬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동생 페리 앤더슨 역시 유럽 중세와 근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캘리포니아 교수이다. 이 두 형제 역사학자가 근대 민족주의의 근원과 변화에 대해 행한 연구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가 1983년 출간한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은 이제껏 민족의 주된 구성 요인으로 파악된 종족이나 혈통, 언어, 문화 등의 요소를 부정하고 민족주의를 근대 민족-국가(Nation-State)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담론으로 파악했다.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이란 고대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실존적 집단이 아닌,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구성물이다. 앤더슨은 “민족은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라 주장하여 학계에 충격을 주었고, 민족주의 연구에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했다.

한국과 같이 민족주의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은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한민국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인식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데, 사실상 지금의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라 다민족 국가다.

그런데 이런 현실과 인식의 괴리가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국제인권위원회 엠네스티도 이미 십 년 전에 한국 정부에 이주민의 인권과 처우를 개선하라는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살색’이라는 단어가 차별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살색은 인종에 따라 다양한데, 한국어에서 ‘살색’은 아시아계 황인종만을 우리나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배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꿔 부르도록 권고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민족’이라는 단일의식은 끈끈하거나 단단하지 않다는 점, ‘하나의 민족으로 대동단결하자’는 구호가 자칫 차별을 조장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상상의 공동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최근의 연구가들은 앤더슨 교수가 제시한 ‘Nation’의 개념을 ‘민족’이라는 제한된 의미에서 벗어나 ‘국민’의 의미까지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Nation은 문맥에 따라 ‘민족’이라고도 혹은 ‘국가’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절대왕조나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도래한 근대의 대부분의 국가 형태가 바로 ‘민족-국가(Nation-Stat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국민’으로 Nation의 의미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민족주의’ 대신 ‘국민주의’라는 번역이 더 많이 쓰인다. 이렇게 되면 민족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국민 역시 일종의 상상된(imagined) 공동체가 된다. 대한민국 5200만 국민은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계층으로 분화되고 나뉘어져 있는가.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도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념지향으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특히 현재 한국의 국민들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계층간, 세대간의 갈등을 겪고 있다. 이 현상에 눈감고 그저 “국민대통합” 운운하는 위정자들의 언술이 지극히 공허한 이유를 앤더슨 교수는 이미 30년도 전에 그의 저서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밝혀 놓았다.

모든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고 앵무새처럼 말한다. 하지만 국민이라는 대상처럼 규정하기 모호한 집단이 있는가? 올 12월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유권자인 우리는 정치인들이 말하는 ‘국민’이라는 집단적인 애매모호함을 걷어내고, 그가 내놓는 정책이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을 팔아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던 위정자들 중,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한국 근현대사의 씁쓸한 진실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