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형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 전설로 내려왔다.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 출신의 ‘조재형’이라는 선배가 있는데 조폭마누라 조감독을 했으며 현재 충무로 영화판에서 감독 데뷔를 하고 있다고. 한마디로 기대받고 있는 영화인이라는 것이다. 당시 대학 자퇴 후 영화과 진학 문제로 방황하고 있던 내게 선배들은 조재형 감독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용기의 술잔을 건넸다.

풍문으로만 듣던 조재형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어느날이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판이 바뀐 영화계는 이제 이전의 도제방식으로 성장한 연출부들에게 감독으로 데뷔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다. 대신 한예종 영상원 출신들이 단편영화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 흐름에 맞춰 조재형 감독은 몇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하였고, 좋은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고단한 창작활동은 심신의 피로를 누적시켰고 자연스레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조재형 감독은 그렇게 광주로 내려와 창작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조재형 감독은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영화 현장 경험들을 광주의 영화인들과 나누려고 애썼다. 당시 충무로에서 잘 나가던 감독, 스태프들이 그의 부탁을 받고 기꺼이 강사로 나섰고, 그 덕분에 지역 영화인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프로듀서’ 역할을 자청하며 현장에서 함께 발로 뛰며 그들을 성장시켰다. 세월호의 비극이 닥쳤을 때는 세월호 광주시민상주모임 기록단으로 활동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했다.

그 많은 활동 와중에서도 그는 매일 밤늦게까지 자기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편집 작업을 했다.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적이 없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매일, 매 시간을 보냈다.

그날 사고도 사무실에서 밤새 다큐멘터리 편집을 하다가 발생하였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뒤로 넘어지게 되었는데 문턱에 목을 부딪혀 척수신경이 크게 손상되었다. 아침이 되어 발견된 조재형 감독은 사지마비 진단을 받게 된다. 목 아래로는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었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삶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계속 솟아 올랐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다. 광주시민상주모임, 광주영화인, 영화패 아리랑 OB 등 그가 활동했던 단체들은 그를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고 여러 경로를 통해 재활을 도왔다.

조재형 감독은 2년 여간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재활에 힘을 쏟았다. 아쉽게도 열정에 비해 재활의 결과는 미약했다. 치료 결과에 대한 실망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외로움’을 불러왔을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며 조재형 감독은 다시 광주로 내려온다.

광주영화영상인연대는 조재형 감독을 맞이하며 ‘회고전’을 마련했다. 조재형 감독이 영화 현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2년여 만에 조재형 감독을 다시 본 나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말은 어눌해져 있었고 인상은 몹시 어두워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날 이후 몇 달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그가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드러내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연말 회고전 이후 ‘똥 싸는 소리’라는 제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준비 중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오직 휠체어와 활동보조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지만 그는 영화 창작의 세계에 빠져 있다. 이미 장편 시나리오가 나왔고 배우들이 모두 캐스팅 되었다. 그리고 10월이면 크랭크인에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조재형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지마비의 신체적 장애조차 이겨내며 창작의 길을 걷고 있다.

이 한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중심에는 광주영화인들이 있다. 영화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많은 광주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 함께 하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 영화인은 광주에 이런 따뜻함이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 말에 대해 광주 영화인들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가 다치기 전 한껏 내어주었던 따뜻함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그리고 영화는 원래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라고.

촬영 이후 변화된 형을 보면 신기하다. 사고로 어눌해졌던 말투가 사고 이전의 말투로 또렷하게 돌아왔다. 표정도 한결 밝아졌고 삶의 의지도 누구보다 충만해 보인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영화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표현하는 감독의 창작활동이지만 결코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이타적인 공동체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만들기가 어려운 예술이 영화다. 영화를 정의하는 몇몇 표현들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공동체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예술’. 혹은 ‘나를 공동체 안에 살게 하는 예술’.

우리는 조재형 감독의 장편영화 ‘똥 싸는 소리’가 조재형 감독만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응원해주는 광주시민, 광주영화인들 모두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조재형이라는 사람을 통해 반영된다. 조재형 감독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우리 모두 각자의 길에서 만나 행운을 만들어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