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세평]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였던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던가. 깊은 밤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지척의 친구일 때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가족일 때도 있었다. 편지를 쓰기 전에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책 속에 밑줄이 그어진 부분 중 일부는 편지에 그대로 옮겨지거나 새롭게 창작되는 바탕이 됐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금상첨화였다. 톡톡톡,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편지지를 채우다 보면 글을 읽고 기뻐할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곤 했다.

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은 또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었던가. 카메라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필수품. 기록을 남기는 것은 여행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숙제처럼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정이자 임무가 아니었던가. 사진은 단지 24컷의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계획하고, 목적지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까지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판의 울림은 지금도 선명하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공원’은 아버지가 거의 매일 흥얼거리던 산책로였고,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역마살 낀 형이 바람 쐬고 싶을 때마다 찾던 항구였다. 형은 전축의 바늘이 닳아 노래가 이상해지면 행여 레코드판에 손상이라도 갈까, 조심스럽게 닦고 또 닦는 것을 잊지 않았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인기와 레코드판 영향 때문인지 한 때는 ‘음악다방’도 인기를 누렸다. 듣고 싶은 노래와 사연을 쪽지에 써서 DJ에게 전달하면 최대한 감정을 이입해 내용을 읽고 음악을 들려줬다. 쪽지에 담긴 사연은 이성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생일 축하, 우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DJ의 목소리를 통해 사연을 들은 손님들은 자신의 일처럼 박수를 치며 축하하고, 합창 소리에 목청을 보태기도 했다. 지금은 우후죽순처럼 많은 커피숍이 있지만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낭만이었다.

얼마 전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어 식당에 갔다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종업원에게 주문을 마치고 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느닷없이 로봇(?)이 음식을 갖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온통 서빙로봇에게 쏠려있었다. 로봇은 “손님이 주문하신 음식이 왔습니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꺼내….” 로봇이 이야기를 마치기 전 종업원이 나타나 음식을 테이블에 옮겨주긴 했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서빙로봇은 사람이 길을 막으면 비켜달라고 하고, 배달을 마치면 맛있게 식사하라며 깍듯이 인사도 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비대면이 늘고 무거운 짐을 종업원이 직접 나르지 않아도 되는 등 업체 측에서는 서빙로봇의 역할이 클 수 있겠지만 손님의 입장에서는 당장 어떤 점이 좋은 것인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키오스크를 활용하는 무인 편의점이나 무인매장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음식점이나 카페 등 일반 매장에서 도입이 시작되면서 점차 확산되고 있는 키오스크는 인건비 절감과 함께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서빙로봇이나 키오스크가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인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서빙로봇이나 키오스크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우리에게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속도를 주었지만 사람만이 간직하고 있는 정서와 감성의 대체제는 될 수 없다. 손님과 눈을 맞춘 채 대화하며 전달되는 온기야 말로 최상의 서비스가 될 수 있는 데 이를 건너뛰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사진 현상을 위해 부지런히 사진관을 들락거리며 여행의 추억을 앨범 속에 곱게 간직하던 감성을 휴대전화나 컴퓨터는 알까. 이기주의, 개인주의의 비릿한 달콤함에 젖은 위정자나 기업가, 갑질이 몸 밴 자들은 레코드판, 음악다방, 손때 묻은 책이 깊숙한 내면의 문을 두드리며 건네는 아날로그의 이야기를 알까.

톡, 톡, 톡.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 조심스럽게 내면을 두드리는 오늘, 아날로그의 매력 속에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