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청포도 中 발췌)

안동시를 통과해 도산서원 가는 길가엔 한참 무르익어가는 청포도를 손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육사 시에서 튀어나온 듯 하이얀 모시처럼 눈부셨다.

선비의 상징인 립(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유림들이 두 손 가지런히 예를 갖추고 장엄하게 종묘에 제를 올리는 도시라고 알고 있었던 안동. 유교 문화가 깐깐해 정치적으로도 보수성향이 짙은 도시라고만 여겼던 안동을 방문할 기회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퇴계 이황,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의 고장이라는 것 외에, 도시에 대한 친숙함이라고는 안동사과가 유일하다.

어쩌면 광주에서는 안동까지 직통으로 오고 가는 대중교통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웬만한 군소도시도 직행고속버스나 KTX가 있기 마련인데 기차나 버스를 대구 등에서 환승해야 하는 지경이니 참 거시기하다. 거리상으로는 300km, 네비 시간상으로는 3시간 30여분 정도 걸리지만 휴게소에서 해찰하다 보면 4시간은 족히 걸린다. 꼭 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을 만큼 심리적 물리적으로 꽤나 불편한 이 길을 수십 년째 오고 가는 여인이 있다.

차명숙. 1980년 5·18 당시 가두방송을 하며 광주시민들에게는 신념과 의지를, 군인들에게 공포감을 유발하게 한 당찬 여인. 그로 인해 위장간첩으로 몰려,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으로 보수의 중심인 대구경북 5·18공동대표로, 경상도에 5·18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 그가 5·18 민중항쟁기념행사위 발대식를 한다고 오월민주여성회를 안동으로 초청했다. 오월민주여성회 윤청자 회장과 몇몇 회원들이 동행했다.

1986년, 안동이 고향인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줄곧 안동에서 살아온 전라도여인 차명숙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청포도처럼 알알이 맺힌 그녀가 살아온 삶이 궁금했다. 5·18의 대표적 상징인물인 차명숙 선생님이 남성중심을 상징하는 유교문화의 대표적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왔길래 무엇이 전라도 여인을 품을 수 있었는지, 선입견이 작용했던 경상북도 안동이라는 도시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조작됐던 그녀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보다 더 없이 팍팍하고 피폐했을 터다. 게다가 광주 전라도인을 비하하는 홍어를 주메뉴로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모습이 도무지 편치 않게 느껴진다. 광주강연이나 기자회견에서 보여주는 힘차고 당당한 모습이셨기에 안동에서의 삶은 치열하게 투쟁하듯 살아오셨겠구나 짐작해봤다. 그래서인지 광주에서 뵐 때마다 애닳은 마음이었는데, 우리를 맞이해주는 환한 웃음은 이 모든 게 기우였음을 알았다.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살아온 덕분에 안동사람은 5·18과 광주에 대해서 큰 마음의 빚을 지고 광주만큼이나 치열하게 5·18 정신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큰 울림이 전해졌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광주에서 안동으로, 오일팔 당사자에서 후대에게로, 잊지 않고 이어가고 새로운 세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 5·18 공동체 정신이 안동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했던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가 외친 광야 안동 땅에서 명색만 양반이 아닌 이치를 알고 기를 다룰 줄 아는 진짜 유림이었고 5·18민중항쟁으로 고초를 당한 광주였고 광주사람이었다. 5·18을 자행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아직도 뻔뻔하게 ‘이거 왜 이래’라고 추잡함을 보이는 늙은 독재자의 모습에서 피가 거꾸로 돌았는데, 동행했던 회원들 역시 감동 그 자체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따스한 눈물을 흘렸다.

19살 차명숙이라는 한 여성은 안동에서 뿌리내리고자 하면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징글징글함이 오일팔 항쟁보다 고문보다 더 심했을텐데도 불구하고 끝끝내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뜯겨나가도 다시 풀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며 안동을, 안동사람들을 변화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차명숙을 품은 안동이 아니라 안동을 품은 차명숙이구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교과서적인 존경이 아닌 진실한 인간으로서 존경과 존중, 그리고 수치심을 일깨우는 양심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안동기념사업회가 앞으로 광주 교류를 적극적으로 프로그래밍해서 대학생, 청소년들에게 교육과 체험을 통해 5·18민중항쟁에 대해 더 많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담아내고자 한다니 우리는 그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세대와 함께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난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대한 올바른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하는 ‘안동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의 말의 울림이 광주 오월에 하는 뜨거운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명숙 누나야, 내는 5·18이고뭐고 명숙이 누나 니가 행복하다문 누나 니가 하라는 데로 끝까지 함께 할란다. 그라믄 행복하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