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역시 한때 조기 학습의 바람이 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감각을 다잡아야 성장해 대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마치 일찍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예술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이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공포스런 법칙처럼 관통했을 것이다. 일찍 시작하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어서다.

어떤 화가는 ‘미술대학을 10년 다녔다네’ 등 대학시절 무용담같은 말이 먼저 회자된다. 화제는 늘 익명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누가 그랬다’더라 하면 그 소문이 화단에서는 금방 퍼진다. 당사자는 이런 소문이 괴로울 수 있다. 여기 유사한 화가가 있다. 그 역시 대학 시절의 언급을 비교적 꺼린다.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끄러워하고, 감출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차피 이력이라는 것이 예술가에게는 껍데기같은 것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화가 박유자씨가 그런 경우다. 박 작가는 스물여섯에 대학에 입학해 서른셋 되던 해 졸업한다. 다른 사람보다 늦었기에 그는 극구 이런 내용을 쉬쉬하려 든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그림이 마냥 좋아 미술학원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때는 꼭 미술대학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여러 여건으로 인해 남들보다 6년이 흐른 뒤 미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면 꽤나 늦은 축에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첫 개인전 역시 뒤로 밀쳐질 수 밖에 없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Day&night’

“2002년에 첫 전시를 열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작품들이 있어요. 그때의 작품을 보면 가슴이 찡해지죠. 여백과 미가 한창 좋을 때였던 것 같아요. 유화작품을 선보이게 됐는데 그로부터 10년 동안 유화로 작업을 했고, 그후 아크릴로 10년을 작업했습니다.”

올해 작업 입문 2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는 줄곧 ‘해바라기 작가’로 불리우고 있다. 작업이 쉽지 않은 탓에 미술을 접을까 하던 무렵에 그에게 운명처럼 포착된 것이 광주시 북구 삼각동성당 옆 해바라기였다. 이 해바라기가 그에게 다시 창작 욕구를 자극했다. 해바라기를 삶에 비유해 작업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채색의 해바라기를 그리다가 고개숙인 해바라기와 꺾인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때 해바라기는 우리네 삶처럼 그저 희망만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다소 어두우면서 무거운 느낌의 색채가 주된 정조를 이뤘다. 그러다가 서서히 해바라기가 밝아졌고, 해바라기를 거꾸로 그릴 수 있게됐다. 마음 속 다짐의 징표처럼 작업실에 해바라기를 정물처럼 걸어두고 그림에 매진했다. 물론 해바라기에 대한 이론적 공부 또한 깊이있게 천착했다. 해바라기 작업만 순수하게 11년째를 맞고 있다. 2009년부터 오로지 해바라기 그림을 고수했다. 다만 보통 다른 작가들은 ‘피고 지는 해바라기’를 주목했지만, 그는 ‘지고 피는 해바라기’에 주목했다. 다른 화가들과는 반대로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꽃말에까지 집중했다.

“해바라기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해바라기는 ‘사랑합니다’가 꽃말인데 바라기나 부(자), 희망, 짝사랑 등의 의미를 좋아했어요. 그 뜻이 좋아 주야장천 해바라기를 화면에 담아온 셈이죠. 저에게 해바라기는 해와 달처럼 빛이자 희망으로 다가왔어요.”

작가는 2009년 유스퀘어문화관에서 대작 중심의 해바라기를 선보여 미술계 안팎의 관심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숲’ 시리즈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해바라기 꽃말이 사랑이나 일편단심, 부귀영화 등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이 꽃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해바라기 그림에 천착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사랑합니다-희망’

초창기 작업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의 해바라기는 지고 있거나 꺾이는, 또 고개숙인 해바라기가 주류를 이뤘다. 근작들에서는 고개를 든 해바라기를 만날 수 있다.

작가가 ‘해바라기 작가’로 불려서 그가 한때 대나무를 그렸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는 2009년부터 해바라기를 그리는 가운데 틈틈이 짬나는 대로 대나무를 그려오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대나무를 테마로 한 첫 전시를 열었다. 더욱이 밤낮의 이미지를 담은 대나무 그림 2점이 한 작품처럼 묶여 선보여 오묘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었다.

이처럼 그가 대나무 그림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일정 수준에 오른 화면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는 늘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품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꼿꼿한 선비정신을 품은 대나무 그림을 서양화로 표현하려다 보니 몇번의 좌절과 실패가 반복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수묵화 쪽에서 그의 회화에 대해 무모한 도전이라고 부정적 반응이 나올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자연 속으로-계절의 변화’

당시 전시에 앞서 “오랫동안 연습을 했죠. 생각보다 쉽게 선이 나왔던 것은 연습 덕분”이라고 밝힌 바 있는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대나무 그림이 나올 때의 희열감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대나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선을 뽑아내는 일인데 이것이 뜻하는 대로 이뤄진데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 및 힘차게 뻗어오르는 생명력, 그리고 바람의 길과 그 바람에의 자연스런 느낌, 자유분방한 구도 등이 맞물리면서 ‘박유자표’ 표현이 나왔다. 아울러 선비나 군자 정신을 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는데 온힘을 쏟은 것도 작가 자신만의 표현을 이끌어내는 근거가 됐다. 여기서 그의 성품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될 때까지 노력하는 작가적 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초창기 작품들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더한다. 그는 지금의 시점에서 옛 작품들에 주목하고 있어서다. 초창기 작품들을 재해석한 작품을 하고픈 이유다.

“제가 초창기 작품을 재해석해보려는 것은 그동안 어떠한 표현을 거쳐왔고, 변화를 거듭해왔는가를 면밀하게 관찰해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죠. 초창기 작품을 모델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이야깁니다.”

광주시 북구 오치동 작업실에 매일 출근해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작업과 봉사활동을 병행하며 창작을 이끌어갈 계획이다.

“현재 코로나19로 굉장히 척박하지만 미술계 안팎의 다수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꿈인 것처럼 저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온갖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게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작업과 함께 봉사도 하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