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녹음(綠陰)으로 짙었던 계절을 뒤로하고 무심히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중국 고대의 사상가 노자(老子 B.C 579~499경)의 도덕경 11장에 남긴 한 구절이 떠오른다.

‘서른 개의 바큇살은 한 곳에 꽂혀 있으나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굴러가고(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진흙으로 빚어낸 그릇도 속이 비어 있으므로 쓸모가 있다.(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채워진 것이 아니라 비워지거나 드러내지 않는 무(無)로서 미학적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있다(有)는 것을 쓸모(用) 있게 증명해 내는 것은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無)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묵으로 그려진 화폭 속에 여백(餘白)은 그림을 그리고 남겨진 공간이 아닌 위치와 크기에 따라 형상(形象)과 색채를 뛰어넘는 무한한 예술적 감흥을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신이 내재한다.

이것은 분명코 형식과 질서의 힘이 공존하고 선과 색으로 가득한 서양예술의 작품에서는 자주 접할 수 없는 표현양식일 것이다.

작가가 내어준 여백에 관객의 시선이 머물고 감정이입(感情移入)에 이르면 자유로운 심상(心想)과 창조적인 세계로 미적 쾌감(快感)을 만나게 된다.

여백의 전형적인 미를 추구했던 중국 남송시대 화가 마원(馬遠)의 산경춘행도(山經春行圖)는 세부적인 묘사보다는 적막한 풍경 속에 선비가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머무는 곳에 여백을 두어 관객에게도 고독한 자아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에서도 가느다란 선묘(線描)와 대조적인 여백은 공허하고 서정적인 감흥에 취하게 만든다.

동양 문화와 철학의 근본이 되는 불교의 공(空),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유교의 소(消)를 동양회화 여백에 견주어 보면 인위적인 표현을 뛰어 넘어 생명력과 기운으로 가득한 화의(畫意)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선입견을 버리고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는 소통과 참된 자유를 추구했던 장자(莊子 B.C 369~289경)는 인간세(人間世 散木: 쓸모없는 나무)편에 ‘기름 등잔불은 스스로를 태우고, 계피와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 사람들이 베어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에 쓸모만 알고, 쓸모없음에 쓸모를 알지 못한다.(無用之用)’라고 했다.

돌아보면 우리는 자신이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 기준을 정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이리저리 거닐며 즐겁게 지내는 삶을 의미하는 ‘소요유(逍遙遊)’는 물질과 욕망에 사로잡힌 현실의 삶을 떨쳐내고 자연의 무궁한 순리를 품어 않고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알 수 있는 것이 고전(古典)과 고서(古書)에 기록을 읽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문학에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평온하고 희망적인 상황을 행복(幸福)이라고 한다.

사전적 어원(語原)으로 행복(happiness)의 ‘hap’은 ‘우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우연한 사건(happening)으로 다가온 것이 행운(good fortune) 이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幸運)이 오는 길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부터 온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행운의 대문을 열어두고, 욕망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진정한 행복이 담길 수 있도록 비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