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시론] 지난 10일 북한은 이례적으로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를 자정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갔다. 전형적인 열병식과 퍼레이드에 불꽃놀이까지 더한 화려한 행사였다. 이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9일 이뤄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는 불참했다. 대신 그의 명의로 된 꽃바구니만 보냈다고 한다. 2012년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이후로 2014년 발목 낭종 제거 수술 때문에 불참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에 대한 참배에 불참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그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김일성·김정일과 동일한 선상에 놓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제 김정은 위원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통치 방식으로 북한의 체제를 공고히 해나가겠다는 결심이 아닐까.

2012년 김정은의 집권 이후 MB정부와 박근혜 정부 대북 정책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김정일 사후의 북한 체제가 자멸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숙청해가며 선대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과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성과를 냈다. 지난 10일 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새롭게 선보인 ICBM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제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새로운 카드를 쥐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을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지렛대(leverage)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툭하면 봉남통미(封南通美)를 외치며 지금껏 우리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쌓아 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일쑤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북미 관계에서 지난 미국 대통령들과의 차별점을 만들고 부각시켜, 그의 미국 대통령 재선에 도움이 되게 하는 일뿐이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처음으로 만나 악수를 나누고, 두 사람이 남북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남북통일이 곧 이루어질 듯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와, 남과 북 각각의 정치적 상황과 속내 때문에 그 가능성은 갈수록 멀어져갔다. 그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 있게 주창했던 연내 종전 선언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제 문 대통령 임기 중에 종전 선언이 가능하게 될지 어떨지도 불투명한 상황으로 변해 버렸다.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식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약 30여 분간 연설을 진행했다. 현장 중계를 TV로 지켜보던 중에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코로나 방역을 위해 힘쓴 북한의 군 장병들 노고를 상찬하며 눈가에 물기가 맺히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 북한 군인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 장면을 보며 필자는 지난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여한 북한 응원단 여성들이,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찍힌 현수막이 내리는 비에 젖는다며 그걸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 한국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두 장면은 북한에서 김일성 혈통의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김정은 역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같은 정치적 우상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만큼 현재 북한의 일인 숭배 체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고하다. 북한 체제는 이름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뿐, 사실은 김씨 왕조가 3대째 세습 통치하는 봉건주의 왕조 국가다. 한반도의 북쪽에서 조선 왕조는 지금도 건재하다. 단지 이씨 왕조에서 김씨 왕조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 즉 김정은 위원장의 북한에 대한 지배력이 공고하고 인민들의 우상화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가능한 통일의 길은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고,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며, 두 체제 모두의 번영을 약속하는 미래를 상호 논의하는 길밖에 없다. 어쩌면 그러한 방식은 ‘통일’이라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통일보다는 평화적 상생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적 상생의 가장 첫걸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종전 선언’이다. 한국전쟁의 종전이 선언되어야만 남과 북이 군사적 적대 관계와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화와 상생은 그 다음 논의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