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을 위한 에너지정책의 대변혁 과정에서 선결해야할 문제는 무엇보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이다. 강력한 방사능으로 최소 10만년은 생태계에서 완전 격리, 중간저장시설 또는 영구처분시설에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원전이 상업운전을 시작한 지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영구처분 보관시설이 전무한 상태이다. 더욱이 국내 각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의 포화시점이 점점 다가오면서 대안 마련을 위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정작 정치적·사회적 갈등에 떠밀려 관련 논의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공론화위원회에 이어 재검토위원회도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의 의견수렴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의 포화율이 조만간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가운데 최근 정정화 재검토위원회 위원장이 사퇴하는 등 파행이 거듭되고 있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 원전 주변 주민, 환경단체가 대승적 차원에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또 공론화위원회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속히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처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공론화위원회 파행 거듭 ‘반쪽자리’

박근혜 정부 때인 지난 2013년 10월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간 자문기구인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발족했다. 이후 2015년 6월까지 609일(약 20개월)동안 40여억원을 투입, 공론화 활동을 끝내고 경주지역을 시작으로 관리방안에 대한 지원용역을 시작하게 됐다.

앞서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안면도와 부안사태를 경험하고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 방안은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국민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처음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해 ‘공론화’라는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12년 제2차 원자력진흥 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사용후핵연료 관리대책 추진계획’을 의결하고 공론화위원회 구성방안 및 공론화 추진방향 등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화 위원 추천 위원회의 심사와 원전소재지역 지자체 및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통한 15명의 위원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사항은 2020년까지 지하연구시설(URL) 부지를 확보하고 중간저장시설건설과 동시에 URL은 2030년부터 가동하며, 2051년까지 영구처분시설을 운영한다는 권고사항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한 당일 환경시민단체 추천위원 2명이 사퇴하고 이후 4명의 위원도 중도 사퇴하는 등 파행을 겪게 되면서 ‘반쪽짜리 공론화’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출범식 당일 사퇴를 한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공론화는 정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당시 위원회는 짜놓은 각본에 따라 위원장을 선임하는 등 민주적 절차를 보장하지 않아 신뢰성이 훼손됐다”며 “위원회 스스로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탓에 제대로 된 공론화를 이끌어 낼 자신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원전소재지역 특별위원회에서 발간한 관리방안 관련 영광지역 의견수렴 보고서를 보면 “정부가 이미 정해놓은 판에 들어가 들러리를 서는 것에 불과하다”며 “공론화위원회 조직은 고준위 핵폐기처분장 부지 선정을 위한 공론화이고, 이를 위해 형식적인 절차로 진행하고 있다”는 종합의견을 냈다.

경주 월성원전의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임시저장시설인 맥스터. 사진제공=한빛원자력발전소

△재검토위원회 출범…공론화 담보 돼야

공론화위원회가 불신을 받게 되면서 대권에 도전한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부터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됐다.

문재인 정부가 탈핵정책을 기조로 신고리원전 건설부터 공론화를 시작해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한 ‘재검토위원회’가 출범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의 민간자문기구로 산업부가 모든 초안을 기획하면서 위원회 위원 추천범위를 두고 상당한 진통을 겪게 된다. 재검토위원회의 출범에 앞서 발족된 재검토준비단은 원전소재지역 관계자 5명, 환경단체 관계자 3명, 원자력계 관계자 3명, 갈등관리 전문가 4명 등 15명을 위원으로 선임, 24회에 걸쳐 6개월 간 재검토단 운영 및 정책건의서를 마련했다.

산업부는 그러나 객관적인 의견수렴을 위해 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를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한국행정학회, 대한변호사회,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한국조사연구학회, 한국언론학회, 한국사회학회, 한국갈등학회 등 총 7개 단체에서 15명의 위원을 일방적으로 구성, 발표하면서 환경단체와 원전소재 지역 주민들과 날선 대립을 이어갔다.

지난 달 12일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개최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의견수렴 공개토론회’의 모습. 사진제공=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지난해 5월 29일 열린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출범식 당일 한빛원전 고준위 핵폐기물 영광군 공동대책위원회와 고준위핵폐기물 전국회의 회원들이 서울 강남구 사무실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정부는 원전지역 주민과 시민사회 참여를 배제한 재검토위원회를 즉각 해체하라”고 반발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환경·시민단체와 산업부간 갈등은 봉합되지 못한 채 올해 6월 25일 정정화 재검토위원장이 사퇴서를 던지는 파행을 겪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부터 현 정부의 재검토위원회까지 부족한 의견수렴에서 비롯된 갈등만 남긴 채 파행을 거듭했지만 정부는 이들 모두를 외면한 채 오직 ‘공론화’에만 집중했고, 그 여파는 지난 6월 6일 열린 ‘월성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추가건설’ 찬반투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빛원전 고준위핵폐기물 영광군 공동대책위원회와 고준위핵폐기물 전국회의 관계자들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출범식 당일인 지난해 5월 29일 서울 위워크 선릉역 2호점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공론화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한빛원전고준위폐기물 공동대책위원회

당시 5만479명이 참여 투표에 참여해 94.8%인 4만7829명이 반대쪽에 표를 던지며 결국 부결됐다.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의견을 묵살한 정부의 일방적 행정행태에 대한 반발이었다.

정정화 재검토위원장은 사퇴 당시 “탈핵시민사회계를 포함해 사용후핵연료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포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위원회를 재구성해야 한다”며 “재공론화는 원전 산업정책 주관부처인 산업부가 아닌, 대통령 직속 또는 국무총리 산하기구에서 추진해야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것이다”고 꼬집었다.

정 전 위원장의 사퇴 등으로 재검토위의 업무 추진이 파행을 겪으면서 당장 경주 월성원전 맥스터(사용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 증설 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95.4%의 포화율을 보이고 있는 맥스터는 오는 2022년 3월 완전포화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 공사기간을 감안해 늦어도 다음 달에는 증설 공사가 시작돼야 하지만 관련 논의가 지연되면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재검토위는 전 국민 의견수렴을 위해 시민 참여단을 선정, 1차 종합토론회를 6월 19~21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균형 있는 전문가 패널 구성에 실패, 이달 10~13일로 연기했다. 하지만 연기된 종합

경주 월성원전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인 캐니스터. 사진제공=한빛원자력발전소

토론회에도 환경단체 등은 빠져 있어 ‘반쪽 공론화’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도 산업부의 고질적인 관료주의가 이번 사태를 야기했다고 지적한다. 지난 2013년부터 8년간 산업부가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보다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통해 이미 방향을 설정하고, 원전 소재 주민들과 환경단체는 이를 보조하는 역할로만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너지정의행동은 정정화 위원장의 사퇴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정부는 단기간 내 ‘성과내기’에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책임과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는 독립적 기구에서 다시 새롭게 첫 단추를 채워야 한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탈핵과 민주적 원칙을 전제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