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완도까지 자동차로 5시간, 다시 뱃길로 50분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섬이 있다. 하늘도, 바다도, 산도 푸르러 청산이라 불리는 섬, 청산도.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오정해와 김명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배경으로도 유명한 청산도는 매년 봄이면 청보리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노란 유채꽃이 만개하면 슬로걷기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리는 한 달간 9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청산도를 찾다 보니 섬마을 주민들은 ‘워메 이러다 청산도가 가라앉것소’하며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맞이했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여파로 축제가 취소되면서 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청산도 주민들의 안타까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기에는 ‘넘어진 김에 신발끈을 묶고 간다’는 말처럼 오히려 지역에서 나타난 변화를 성찰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현재의 청산도가 섬 여행의 명소가 되기까지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농림축산식품부, 환경부 등 다양한 부처의 지원사업이 투입된 결과다. 우리나라에서 청산도처럼 농어촌 지역활성화를 위한 사업은 도서특성화육성사업, 어촌뉴딜300사업,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비록 지원하는 부처나 사업명칭은 다를지라도 추진방식은 주민주도형 마을만들기 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주민주도형 마을만들기는 ‘풍요로움’을 목표로 한다. 마을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지금보다 환경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더 좋은 마을로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에 대한 생각은 개인별로 차이가 있어 사업내용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인 사람도 있고 또 매우 긍정적인 사람도 있다. 또 부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마을이라면 좋을텐데’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을 때 주민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
한편 다양한 지역활성화사업을 통해 성과를 내고있는 지역이나 마을을 살펴보면 지역 내 총생산이 늘었다. 주민들은 마을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고 부족한 역량을 조직화와 학습을 통해 강화하였다. 그 결과 민박에서 식당까지 매출이 늘어나고 개인소득 또한 증대되면서 지역 내 노동생산성 역시 증대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우수한 마을이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방문객 수나 소득증대 수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사업성과를 재촉하는데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 마을과 지역 안에서도 상대적인 여건의 유불리함, 사업참여기회의 편중과 개인 간의 역량 차이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심지어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성까지 훼손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공부문의 지원을 통한 농어촌 지역개발사업에서 성과란 무엇인가? 분명 잘 정비된 시설과 복원된 경관 그리고 운영을 통한 소득증대가 성과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설과 소득증대 못지않게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의 구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마을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웃과 함께 협의하고 합의하며 해결해 나가는 삶의 방식을 실천에 나가는 것이다. 마을만들기는 리더의 헌식적인 노력과 이웃들과의 협력 그리고 공공기관의 지원이 상호작용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의 기회는 균등해야하고 과정은 공정해야 한다. 여전히 마을 안에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비록 마을 안에서든 마을 간이든 풍요로운 마을만들기를 위한 경쟁 속에서도 나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마을 안에서 불균형이 심화되면 사회적 관계망을 훼손시키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사업비가 하는게 아니라 사람, 주민이 직접 해야한다. 마을만들기는 사람 만들기이며, 사람만들기가 바로 마을만들기다. 마을 만들기의 주역은 사람이며,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성이 마을만들기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분명 낯선 시간이지만 청산도에 관광객만 없을 뿐 청산도다움은 오히려 돋보이기 시작한다. 주민들의 인식과 행동에도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봄은커녕 비록 예측하기 어려운 여름과 가을 앞에 섬 전체가 힘들지만, 이 봄 청산도는 지난 10년간 슬로시티 사업을 돌아보며 새로운 10년을 준비한다, 많이 알리고, 많이 불러들이려고 애쓰며 관광객만 바라보던 섬 주민들이 예정에 없던 쉼으로 인해 이제는 이웃을 바라보고 서로 말문을 튼다. 때론 앞으로 계획 중인 일도 혼자서만 하기보다 함께 할 수 있겠다며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대와 협력을 위한 논의도 시작한다. 2020년 봄, 청산도에서 관광객들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으나 자세히 보면 청산도 주민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풍요로운 청산도 만들기의 최종 목표는 길과 건물의 완공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있다. 역시 청산도의 봄은 유채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