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구 금동 인쇄의거리 창조사 3층에는 화업 50년을 맞은 그의 작업실 ‘일지춘실’이 있다. 그는 2000년으로 접어들며 이 작업실에 둥지를 튼 이후 15년 넘도록 머물며 작업을 펼치고 있다. 애초 그의 작업실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선 곳에 자리했었다. 그때 건물주가 새롭게 마련한 곳으로 이전했다. 물론 건물주가 꼭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 지금의 자리에 작업실을 두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에 가본 그의 작업실은 그림도구 등 각종 살림살이와 키우던 개(犬)가 있었다. 살림살이가 너무 꽉차 답답함이 있었으나 지금은 웬만한 살림살이를 치워 작업실 풍경 또한 비움의 공간으로 바꿨다. 지금까지 봐온 그와 그의 그림은 실제 삶이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느낌이다. 자리에 앉자 마자 그는 “비우고 채우면서 가는 것이 삶”이라고 언급한다. 작업실의 잡다한 세간 살림을 덜어낸 후 이같은 생각은 더욱 명징해 보였다. 잠시 든 생각이었지만 그의 화폭 역시 비움의 여백미가 늘 함께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마치 욕망에 짓눌려 가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며 가라’는 암시인 듯하다. 주인공은 목운 오견규(74) 작가. 그는 이름보다 호가 화단에 더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사유와 기품이 살아있다.

‘세한도’

목운은 애초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화단에서 화가들은 모두 유년기부터 미술에 입문하지만 그는 20대 때 월남에 파병돼 복무한 뒤 대위로 예편한데 이어 공무원으로 재직할 무렵 전일빌딩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전남 신안 출생으로 남종화의 대가로 평가를 받던 아산 조방원 선생(1926∼2014)의 작품전을 관람하고 큰 감동을 받으면서다.

물론 전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며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그림의 기본을 닦기는 했다. 원래 시인이 꿈이었던 그가 화가로 돌아선 사연이다. 그 이후 아산 선생을 만나면서 화가로 좀 더 진일보한 작업들을 펼쳐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산 선생의 작품을 보면 수묵의 그윽한 맛이 있습니다. 제게 가장 인상깊은 분이기도 했구요. 다른 그림들을 봐도 아산 선생의 그림만 굉장히 독특해 보였죠. 그래서 아산 선생을 찾아뵙게 됐는데 처음에는 안받아주시더군요. 6개월 동안 그의 화실 문을 여닫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을 지켜보다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하며 지도해 주셨어요.”

이는 그와 아산 선생과의 인연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산 선생은 그에게 “그림을 어디서 그려봤냐, 붓(끝)이 섰다”고 하면서 입문을 허락했다. 그러면서 사람 됨됨이까지 파악했다고 한다. ‘엷은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뜻의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자세로 수행하듯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아가라는 분부를 했다는 대목까지 들려줬다.

‘홍매와 의자’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지난 2월27일부터 3월11일까지 무등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뒤끝이라 작업을 잠시 쉬고 있을 때여서 그가 생각하는 사유나 담론에 대해 더 깊이있게 들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림에 입문하게 된 계기나 아산 선생과의 인연을 세세하게 들려주는 이면에는 창작보다는 비우고 채우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유하고 있기에 그림을 내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삶의 담론들을 정리하며 채우는 과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저는 ‘그림이 시’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은 숨길 것을 숨겨두고, 보여줄 것만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늘 그림과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죠. 지금 이 나이에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주변이든, 사회든 진실의 말을 그림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이 많은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요.”

‘뼛속까지 추워봐야 코를 찌르는 향을 얻을 수 있었다’는 명언을 들려준 그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데 공감을 표한다. 그는 전시 후 일종의 산문인 수상록 같은 글들을 정리하며 보내는 중이다. 개인전 이후 그림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글로 돌아온 셈이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알지만, 그는 어엿한 등단 문인이다. 계간 ‘서정과 상상’ 수필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요즘 삶 전반에 대해 성찰하고 정리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글은 그에게 또 다른 채움으로 읽혀졌다.

오견규 작가는 “‘그림이 시’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은 숨길 것을 숨겨두고, 보여줄 것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늘 그림과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밝혔다.

“제 나이가 군더더기를 다 털어내고 정리하는 때죠. 전시 기간 중 화실에 비가 새 미술도구들이 젖어 못쓰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제게 비우며 살라고 가르치는 듯 하더군요. 비우고 사는 것을 다시 되새겼죠.”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접하고는 ‘너무 텅 비어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데 거리 두기이자, 낯설게 하기의 방법으로 비움과 채움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더라면 단점이 되기도, 장점이 되기도 했을 터이지만 아쉽다는 반응이다. 조금 더 농밀해질 수 있는 그림의 세계 구축을 위해 아카데미 교육을 언급했다.

하지만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줄서기 교육이 되는 현실적 한계도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족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을 예술을 하는 사람의 덕목으로 꼽았다.

“저는 부족하기 이를데 없어요. 세상을 다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세상을 다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자랑해봐야 꼬집힘 당한다고 봐요. 정상에 있는 나무들은 키가 작고, 뿌리가 작아요. 결코 모가지를 내밀지 않죠. 만약 모가지를 내밀면 바람이 모가지를 낚아채 가버리지 않겠어요. 문하생을 두지 않는 것은 제 그림도 못하고 있는데다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오견규 작가.

그는 작가들에게 존경받는 것이 최고의 찬사이자 소망이라고 밝힌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 쪽 정리를 위해 틀을 잡고 있다는 그는 강성률 교수(광주교대)의 ‘철학의 세계’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 버린 시간’ 등 세권을 전시가 끝나자 구입해 본격적 독서를 하는 중이다. 독서의 한 키워드는 고독인 듯하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는 인용문을 들려줬다. 예술을 학문으로 여기는 그의 행간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지 못하면 그림 역시 선정에 든 그림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중국미술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계획으로 들렸다.

“조선미술사도 많이 하고 있지만 폭넓은 중국미술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문화는 우연이 없어요. 호불호가 있을 뿐이지, 남의 것을 알면 내 공부가 훨씬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