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처음이라서 “떨린다”던 그들이지만, 무대에서 어려운 동작들을 척척 해내는 둘을 보고 있자니 “역시 보통 아니네”란 생각이 절로 든다.
광주시립발레단의 강은혜(27)·이기행(26) 상임단원은 말 그대로 보통이 아니다. 3월 26일자로 첫 출근을 한 예술단 새내기들이, 오는 7월 열리는 ‘백조의 호수’ 주역을 꿰찼다. 강은혜씨는 우아한 백조 ‘오데뜨’와 고혹적인 흑조 ‘오딜’을, 이기행씨는 ‘지그프리드 왕자’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특히 한국 발레 거장 최태지 예술감독이 발탁한 이들이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최근 공연 준비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강은혜·이기행 단원을 연습실에서 만났다. 둘에게서 ‘신입’만이 풍기는 기분 좋은 설렘, 흥분 그리고 무엇이든 잘해내고 싶은 열정 같은 것들이 훅! 하고 느껴진다.
둘은 요즘 “꿈같고, 행복하다”고 운을 뗀다. 꿈의 무대라 여겼던 광주시립발레단에 입단하게 된 것만으로도 좋은 일인데, 주역까지 맡게 됐으니 겹경사를 맞은 셈.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오직 ‘백조의 호수’ 생각뿐이라는 은혜씨는 이번 무대를 통해 “광주 발레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며 당차다. 기행씨 또한 “지그프리드 왕자로 완벽하게 변신,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집중할 수 있는 무대를 꾸미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영광의 주역들은 모두 광주에서 태어나 ‘발레 꿈’을 키워 온 무용수들이다. 발레단에서야 군기 바짝 든 신입이지만, 토슈즈를 신고 무대에서 뛰어 온 세월은 그리 짧지 않다.
은혜씨가 발레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방과 후 활동 때다. 처음엔 그저 취미 정도로 시작했는데, 깊이 알면 알수록 점점 흥미를 느꼈다. 새롭게 알아가는 것, 안되던 것을 완성시켜 나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처음부터 발레와 좋은 연을 맺었던 은혜씨와는 달리, 기행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발레는 여자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발레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고백한다. 꿈이 없어 방황하던 시절, ‘기술’을 배우러 특성화고에 진학했던 그에게 던져진 것은 토슈즈였다. 무용 수업 시간에 그를 눈여겨보던 선생님이 “발레 학 생각 없느냐” 끈질기게 설득한 것.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춤을 추는 게 싫었던 이씨는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지만, 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발레는 남자가 꼭 필요한 예술이구나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기행씨는 강원대 무용학과로 진학해 공부를 이어갔고, 졸업 후에는 국립발레단 준단원으로 활약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하면서도, 퇴근 후엔 연습을 이어갈 만큼 열정이 대단했던 그였지만, 발레 인생의 위기도 찾아왔다. 그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의사로부터 “앞으로 춤 출 수 없을 것이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버티기 어려운 고난이었을텐데, 그는 사고 후 1개월 만에 다시 춤을 췄다. 지인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였다.
둘의 대답을 듣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진다. 이들에게 ‘발레’란 무엇일까. 은혜씨는 망설임 없이 애증의 관계라 정의한다. “정말 재미있는데, 또 너무 힘들다. 제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나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이에 기행씨는 중독·활력소·힘·비타민 등의 단어들을 수가지 나열한다. 그러면서 “긍정적 의미의 단어들을 모두 넣어도 넘치지 않는다”며 진지하다. 둘에게서 발레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진다.
누구보다 발레를 사랑하는 이들이 꼽는 발레의 매력은 같다. 발레가 “꼭 하얀 도화지” 같다는 것. 무대 위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그려나가느냐에 따라 전하고픈 이야기는 물론, 작품성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맡겨진 중역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몸짓으로 기대에 보답할 작정이다.
요즘 은혜씨와 기행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붙어있다. 아침에 출근해서는 발레단 스케줄 표에 따라 리허설을 소화하는 게 우선이다. 공식적인 연습은 오후 4시면 모두 끝이 나지만, 주역들의 연습은 이때부터가 진짜다. 최태지 감독의 지도 하에 개인연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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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행·강은혜씨 |
기행씨는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최태지 감독님이 오시고, 정말 좋은 타이밍에 합류하게 된 것이 무용수로서 큰 행운이다”며 “감독님을 비롯한 지도위원, 선배님들의 에너지를 받고 뛸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신단원이라서, 그리고 처음이라서, 저마다 말 못할 부담감도 가지고 있을 터. 다만 지혜로운 이들은 이 같은 심적 부담감을 떨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끝없는 연습과 노력임을 벌써 알고 있다.
‘백조의 호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작품으로 꼽힌다. 이들이 맡은 ‘오데뜨’와 ‘오딜’ 그리고 ‘지그프리드’는 발레리나·발레리노로서 꼭 뛰어 보고픈 꿈의 배역이다. 귀한 기회를 얻었기에 캐릭터 분석에도 공들 들인다.
어떤 연기를 보여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은혜씨는 “완전한 백조가 되려 한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백조처럼 포즈를 취해주는데, 진짜 한 마리 백조처럼 보인다. 기본자세 자체가 몸도, 팔도, 고개도 뒤쪽으로 한껏 밀려나 있는 터라, 어깨·목·허리 무리가 안가는 데가 없다. 여기다 사뿐하게 날아오르는 백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은혜씨는 무한 다이어트 중이다. 지난 5월9일 마련된 ‘백조의 호수’ 기자간담회에서도 발레리나 특유의 여리여리함을 뽐냈는데, 일주일도 안 돼 5kg이나 더 감량했다 한다. 1~2kg 감량도 힘든 보통 사람에겐 언감생심. 프로가 아니고서야 상상조차 고난이다.
은혜씨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물 위를 노니는 백조처럼 보이고 싶다”며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는 그런 고뇌들도 몸짓으로 표현해 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백조 ‘오데뜨’와 강렬한 유혹의 흑조 ‘오딜’까지 1인 2역을 소화해 내야 한다. ‘선과 악’ 감정의 넘나듦은 섬세한 표현력은 물론, 고난도 테크닉이 갖춰져야 함은 당연하다. 특히 ‘오딜’이 왕자를 유혹하며 펼치는 연속 32회전 춤은 발레리나로서 최고 기술로 손꼽힌다.
기행씨 앞에 놓여 진 과제도 가볍지 않다. 그는 “지그프리드의 내적 갈등·양면성 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발레는 ‘보는 예술’이기 때문에 동작만으로는 감동을 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저만의 감정 연기를 선보여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강은혜·이기행 신입단원이 첫 주역을 맡은 광주시립발레단 정기공연 ‘백조의 호수’는 7월13~15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 무대에 세 차례 오른다. 이들이 몇회 차 무대에 오를지는 아직 미정이다. 한국 발레 거장 최태지 감독,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 볼쇼이 발레단의 조명·의상 디자이너 등 최고 제작진들이 만들어내는 ‘백조의 호수’에 국내외 관심이 집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