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대사 때 장례식장, 결혼식장 등에서 예식을 하고 손님 치르는 것이 흔한 일이다. 혼주나 상주에게 가장 머리 무거운 음식장만이나 접대 등은 식장 측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도입되기 전 멀지 않은 과거에 시골에서는 경사든 조사든 동네 사람을 대상으로 잔치를 열 일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과방(果房)이 차려졌다. 예상되는 인원수를 가늠해 준비할 음식의 양과 종류를 정하고, 실제 잔치가 벌어지면 손님 접대와 배식을 담당하는 임시 주방 기능을 했다. 이때 과방의 지휘는 칼질을 하는 칼잡이가 맡았는데,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의 눈짓 하나에 서빙을 담당하는 어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특히 음식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상을 받는 사람의 경중과 신분에 따라 내어놓을 음식 종류와 양을 지정해 줬다. 칼잡이가 사는 동네 어른이나 친척의 상에는 훨씬 후한 음식이 나갔고, 하다못해 같은 접시의 고기라도 그 두께가 더 두툼했다. 평소 신세 졌던 사람이 눈이라도 찡긋 할라치면 고기 한 덩어리를 뚝 잘라 치맛자락에 감춰 넘겨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칼잡이 마음이었다.

그런 칼잡이는 혼주나 상주가 임명은 하되 과방 운영을 일임해야 했고 독립성을 보장했다. 그야말로 믿고 쓰는 사람한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동네잔치 전반에 대한 운영은 안주인이나 친척 중 한 명이 맡았지만 과방 운영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못해, 안주인조차도 과방에서 주는 주안상을 말없이 받아야 했다. 상머슴 또한 잔치에서 벌어지는 시비나 인근 불량배의 행패를 막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잔칫집의 꽃인 과방에는 얼씬도 못하고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자신의 낯을 내세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역에서도 십 수 명의 인원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선에 기여를 했거나 정치권과 줄이 닿았거나 여하튼 정권의 핵심부에 진출했으니 개인적으로나 지역 차원에서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선과정을 지켜봤던 한 인사의 말을 빌자면 그 속내는 낯 뜨겁기 그지 없었단다. 조회 대상자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답변, 이를테면 괜찮은 친구, 능력 있는 사람, 신망이 있는 사람 등과 같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보다는 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험담하고, 심지어 공적을 부정하는 주변인의 평가들이 너무 많더란다. 기왕이면 내 동네, 내 주위 사람이 큰일을 하러 권력 핵심부로 들어간다는데 축하보다는 ‘발목잡기’에 더 힘을 쓰는 것 같아 난감했다는 얘기다. 지난 박정희 정권부터 수십년 이어진 보수 정권 때 경상도에서는 ‘한 집 걸러 청와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혹여 이웃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심보인지 의심이 갔단다.

지난 주 끝난 광주시장 선거에 나섰던 한 후보 캠프에서는 선거 전략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후문이다. 후보 당사자는 “광주가 전국도시, 세계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5.18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벗어야 한다”며 “5.18 과제의 정부 이양과 5.18 관련 단체의 정리 등을 공약으로 내걸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거 참모들의 강력한 반대에 결국 후보는 생각을 접어야 했다. ‘5.18로부터 자유로운 광주’라는 말이 백번 맞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이 적지 않지만 대다수 시민들이 표로써 지지할지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이를 정치적인 공격 수단으로 삼는 세력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을 했다.

광주시는 지난 4년 동안 ‘민주, 인권, 평화도시 건설’과 ‘자동차 100만대 생산기지 건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았다. 자동차 100만대는커녕 손수레 한 대 생산할 시설을 늘리지 못한 채 ‘광주형 일자리 창출’이라는 모호한 구호와 과제만 남겼다. ‘민주, 인권, 평화 도시’는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해 피해자 가족과 포옹함으로써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게 됐다. 그야말로 ‘올 킬(all kill)’이었다. 민선 6기 광주 시정에 대한 점수가 후할 리 없다. 허송하다시피 한 지난 4년 세월이 아깝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 광주가 바뀌고 깨어나야 하는 시기를 맞았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국정운영에 힘을 더하게 됐다. 때를 맞춰 청와대와 내각의 2기 개각 얘기가 흘러나온다. 새로운 광주시장도 뽑았다. 이번 주에는 빛그린국가산단 친환경차 완성공장 설립과 관련해 협약식이 열린다.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하고 활용할 자세를 가다듬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5.18로 대변되는 민주, 인권, 평화라는 ‘명분’을 실질적인 지역발전으로 연결할 ‘현실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지역 인재라도 칭찬하고 북돋아 중앙 무대의 큰 인물로 키워내는 노력도 필요하다.

주인이 돼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최상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뱃속이라도 채워야 한다. 잔치를 총괄하는 안주인이나 불량배 퇴치하는 상머슴은 보기는 좋다.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음식’이 유통된다. 잔칫집의 진짜 실력자는 과방의 칼잡이다. 얼굴 없이 일하면서 ‘먹을 것’을 좌지우지하는 그가 잔치의 주인인 셈이다. 칼잡이를 키우는 일, 아니면 과방의 보조 어멈 한명이라도 밀어 넣는 것이 실리다. 이런 일을 치사하거나 체면 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인적인 현실감각’으로의 전환이 우선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