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이 넘어서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그것도 ‘확’ 틀었다.

중소기업 기술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직장인이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것. 세 딸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 행한, 무모하고도 엄청난 결단이었다.

처음엔 그저 취미였고 애정이었다. 어디에선가 국악이 흘러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고, 라디오 주파수는 늘 국악방송에 맞춰뒀다. 그러다 우연히 공연장에서 송순섭 명창을 만난 게 ‘일’을 벌이게 된 계기가 됐다. 세상을 호령하는 듯 한 호탕함이 그의 귀에 꽂혔다가, 이내 뒤통수를 탁! 때리기에 이르렀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송 명창을 따라 나선 길이, 지금껏 소리하며 사는 예능인의 길로 이어졌다.

사연의 주인공은 광주시립창극단 상임단원 박운종씨다. 서른 중반의 그 선택이 ‘옳았음’을 그는 창극단 무대에서, 또 소리판에서 증명해내며 살고 있다.

“지금껏 소리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그때 스승이 그랬거든요.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 돈을 벌지만, 소리를 하면 이름을 남길 수 있네’라고요. 그 말이 저에겐 희망이었어요.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소리를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한 평생 소리를 해 오신 분이 제 ‘싹’을 보아주었다는 것이 황송했죠.”

그렇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에 앞서 큰 ‘산’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아내에게 이를 전하는 것이었다. 2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다. 단편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무모한 짓이 분명했다. 줄줄이 딸이 셋이나 있었고, 빠르면 3~4살 늦어도 청소년기에는 시작하는 판소리를 서른이 넘어 시작한다니. 박씨 본인이 생각해도 일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스르고서라도 하고픈 게 소리였으니, 도리는 없었을 터.

“어렵게 아내에게 이야길 꺼냈죠. 그런데 너무 쉽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란 말을 해주더라고요. 아내가 교사였는데,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니 괜찮다고 되레 격려를 해줬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이 커요. 아내에게 날마다 절하고 삽니다.”

늦깎이에 입문했지만 그는 타고난 것들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시조를 하셨던 분이었고, 선조 중에는 우리나라 3대 악성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난계 박연 선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리꾼이 된 것이 결국 ‘핏줄’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끌려갔다는 것이다.

1999년 그는 광주시립창극단에 입단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몇 곱절의 노력들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한 말. 박씨는 공연 연습이 없을 때면, 비어있는 창고에 들어가서 홀로 소리를 했다. 한 번 시작하면 5시간 줄곧 소리를 했고, 연습 후엔 목이 새서 말하기 힘들 정도가 되는 건 다반사였다.

박씨는 27~28일 창극단 정기공연으로 선보이는 ‘수궁가’에서 용왕역을 맡았다.

그렇게 박씨 ‘피’에 실려 있던 가락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박씨는 판소리 다섯바탕의 주요 배역들을 대부분 소화했다. 심청가의 심봉사, 흥부가에서 흥부 그리고 놀부, 27~28일 정기공연 수궁가에서는 용왕 역을 맡아 관객들에게 소리의 맛을 전할 예정이다.

소리를 시작한 이후, 후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시기’와 ‘때’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너무 경솔했구나 싶었어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님을 몸으로 느꼈죠. 판소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한 뼘도 내어주지 않는 완고함이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걸 요구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개인적으로 판소리는 ‘수양’과 다름없다고 봅니다. 소리는 곧 나 자신이고, 나를 올곧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에요. 끝없는 수양과 노력만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답이겠죠.”

그런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 온 건 소리꾼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40대 중반 무렵이었다. 갑자기 왼쪽 얼굴에 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소리꾼에게 얼굴 마비는 그 생명력을 위협할 정도로 큰일이었다. 표정으로 온갖 말을, 또 소리를 하기에 그랬다. 원인은 성대 신경 쪽에 이상이 생긴 탓이었다. 의사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면,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씨는 아주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몇 개월 간 매일 밤 산속을 헤맸다. 속이 너무 답답하고, 또 억울한 마음이 그를 괴롭힌 탓이었다. 결국 그는 수술을 결정했다. 머리를 열어야 하는 대수술이었는데, 예후가 좋지 않으면 한쪽 눈 시력과 한 쪽 귀의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소리만 할 수 있다면 괜찮다” 했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 고난 속에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글’이다. 박씨가 산속을 헤매던 차, 어느 날 세상이 달리 보였다 한다. 보이지 않던 산등성이가, 나뭇잎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꼭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부터 그는 ‘글 쓰는 소리꾼’이 됐다. ‘어떤 그리움’을 비롯해 ‘그 해 5월 그리고 나도 늙는다’, ‘오태석 바람 위로 날다’, ‘청이’ 등 무대극으로 선보인 작품도 여럿이다.

글을 쓰게 됐으니, 자연스레 창작판소리도 나왔다. 그는 독도를 주제로 한 판소리를 내놓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삶을 다룬 이야기도 작창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쉬운 일 같지만 참 어렵거든요.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진로를 바꿔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그때 용기가 없었다면 이렇게 소리하는 일도, 관객을 만나는 일도 없었겠죠.”

20여년 창극단원으로 활동한 예술인의 시각으로 바라 볼 때, 안타까운 점들도 여럿이다. 광주가 훌륭한 인적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부분은 특히나 그렇다. 창극단원만 해도 50명인데 그 면면의 예술인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다.

“예향 또는 문화도시라고 하는 광주에서 조차 ‘국악이 낯설다’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전통예술인인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죠. 다만 창극단은 광주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단체인 만큼 훌륭한 인재들이 적극 커나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것에도 힘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 많은,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이고 싶은 것은 예술인들의 당연한 욕심이거든요.”

박씨는 누가 들어도 편안한 소리를 내는 게 꿈이다. 자신의 소리가 꼭 ‘어머니 품’과 같았으면 하는 게 소리꾼으로서의 바람이다. 소리의 편안함은 소리꾼의 진심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특별하지 않아도, 어떤 큰 자극이 없어도 절절함과 애절함 그리고 에너지가 전해지는 소리를 하고 싶어요. 소리꾼이 내뿜어야 할 에너지를 제대로 내는 것이야말로, 공연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과 다름 아니거든요. 앞으로 발표회를 자주 열어 시민들에게 제 소리의 진심을 전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쭉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생의 진로를 ‘확’ 틀었던 그때의 그 결심, 그리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자신의 걸음걸음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소리하면서 누구보다 행복했으니, 이제 그 행복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진심을 담은 소리로, 청중들의 가슴에 가 닿는 소리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