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간만에 시외로 일탈을 감행한다. 분주한 일상 때문에 광주 인근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가족 모두 출근하고, 학교에들 가 집에 덩그러니 홀로 놓여졌다. 무기력해지기 쉬운 날이다. 몸이 퍼지기 전에 어디라도 다녀올 요량으로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나선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전라도 정도 천년이니, 정명 천년이니 하는 소리를 익히 들어온 터라 이번 여행지는 나주로 결정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때 ‘전라도’라는 명칭이 처음 쓰였으니까 올해 1000년을 맞았다. 때문에 그 의미도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나주를 둘러보기는 힘든 탓에 금성관(錦城館)을 위시로 한 나주읍성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주를 향하는 길, 날씨가 우중충하다. 비가 내려 마음까지 질척거리는 듯하다. 광주서 무안 간 고속도로를 타기 보다는 국도로 빠져나갔다. 빨리 나주에 도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어서 때문이다. 시골풍경이라도 실컷 구경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평동공단을 빠져나가자 아치 홍보설치물이 눈에 들어온다. ‘영산강 문화의 뿌리 생명의 땅 나주’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생각없이 오갈 때는 눈에도 잘 띄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어온다. 가는 동안 밖으로 보이는 나주 풍경은 회색빛이었다. 아직 나무들이 제대로 푸른 빛으로 깨어나지는 않았다. 주유소나 교통안내판이 가장 진한 컬러색일 정도였다. 그만큼 들판은 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달려 동신대학교를 지나 목포방향으로 달리다 우회전해 골목을 탔다. 멀리서 금성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금성관을 누가 가까이에 옮겨놓은 것처럼 점점 규모가 크게 다가왔다.

점심 무렵이어서 방문객들은 많지 않았다. 올 때마다 나주가 역사의 도시라는 것을 느끼지만 이번 방문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운치있는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돌담 너머로 금성관이 보인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나주 목사로 재직한 이유인에 의해 건립된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이곳은 금성관을 비롯해 좌우에 동익헌(東翼軒·벽오헌)과 서익헌(西翼軒)이 자리하고 있고, 중삼문이 남아있다. 넓은 마당 때문인지 건물이 더 웅장하게 보인다. 다른 한쪽 담벽은 펜스가 쳐져 있다. 동측부지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어서다. 동측부지에서는 연못과 수로, 축대, 회랑, 정자 등을 발굴했다. 이 펜스에는 나주와 관계된 문장들이 적혀 있어 정도 1000년과 관련해 나주가 얼마만큼 유서깊은 고을인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금성관 입구 2층이 외삼문으로 정문인 망화루(望華樓)다. 여러 차례 갈 때마다 폐쇄도 있었는데 이날 운이 좋게 개방돼 있어 2층으로 올라가 금성관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

망화루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펜스가 둘러쳐져 있는데 이 펜스에는 옛날 나주와 관련된 시가 등 문장이 적혀 있어 나주가 생각하는 정도 1000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비단 빨던 강가가/고려 태조/처가의 고향이요//흥룡사(興龍寺) 안에/그 서광이 어리었도다//지금도 부로들은/남긴 덕을/그리워하여//피리 불고 북치면서/추대왕(惠宗)을/즐겁게 하도다’ 이는 김종직의 12영(十二詠) 가운데 한 구절이다.

또 ‘나주는/전라도에서/가장 커서/땅이 넓고/민물(民物)이/번성하다//땅이 또한/바닷가라/벼(稻)가/많이 나고/물산이 풍성하여/전라도의/조세(租稅)가/모이는 곳이다’이는 서거정이 벽오헌 중수기에 적은 글이다.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옛 선현의 글을 감상하는 호사까지 누렸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 금성관은 역사적 자취가 서려 있다. 의병장 김천일이 여기서 출병식을 했고,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행진 기점이나 결집 공간 역할을 했다 한다. 또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당시 이곳에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고취했다고 전해진다. 여기다 후원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방문객들을 옛 시대로 안내하는 듯하다.

나주향교 대성전 모습

금성관을 둘러본 뒤 엎드리면 코 닿을 듯한 거리에 자리한 나주향교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3000명이 산화, 슬픔이 서려있는 서성문(영금문·映錦門)을 만났다. 일본에 의해 완전 파괴됐다가 2014년에서야 복원된 것이다. 만약 옛 서성문이 보존됐다면 얼마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됐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앞섰다. 읍성 4대문은 현재 복원이 종료돼 있기는 하다.

서성문을 지나 호남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인 나주향교에 이르렀다. 나주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전국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처음 지어져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진다. 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 내삼문으로 이뤄져 있는 가운데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보통의 향교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인데 이곳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건축 양식이 뛰어난 조선 후기 대표적 향교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나주향교를 찾았을 때마다 대성전은 담 너머로만 볼 수 있었는데 이날 운좋게도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 샅샅이 훑어볼 수 있었다. 5칸 규모로 웅장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무사하게 보존됐다. 당시 불로 인해 소실됐던 서울 성균관이 나주향교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이 건축물이 갖는 의미를 깨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옛 건축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목사내아 금학헌

나주향교를 나와 금성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목사내아 금학헌은 양반집 같은 형태인데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이 머물렀던 관사로, 오늘날 도지사 관사로 이해하면 된다.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 때문에 하룻밤 묵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내아 옆 담 옆에는 오백년 수령의 팽나무가 서 있는 데 벼락에도 꿈쩍않고 살아남아 모든 방문객들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기원의 나무’가 됐다.

또 금성관 일대 옛 건축물들을 뒤로 하고 근대 건축물을 찾아나섰다. 가는 길에 광주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남고문(南顧門)을 만났다. 방향이 맞지 않았지만 괜히 차로 한바퀴 돌며 여운을 달랬다. 1993년에 복원해 올해 25년을 맞고 있다. 교차로 한 가운데 자리한 나주 읍성 4대문은 나주가 고도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주는 목포와 함께 근대 건축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근대로의 여행 역시 나주읍성 일대만 돌아도 충분하다. 전국농민총연맹 나주시 농민회와 여성농민회 등이 사무실로 쓰는 옛 나주경찰서 건물(1920년대 건립)과 일본인이 거주했던 번화가의 창고를 개조해 출발한 옛 나주극장 등도 근대역사와 만날 수 있는 상징들이다. 하지만 체계적 관리와 보존 노력이 아쉬웠다.

퇴락해가는 나주극장 뒤편에 자리한 옛 나주잠사는 1910년대 건축물로 전남 최대 잠사공장이었다. 공장의 상징인 굴뚝이 오늘날까지 건재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최근 ‘나빌레라 문화센터’로 탈바꿈됐다. 전시와 공연 등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인천 아트 플랫폼이 생각났다. 그 어느 현대식 건물의 예술공간보다 운치있고 단조롭지 않은 공간으로 예술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둘러보면 느끼는 점이 많을 것으로 보였다.

금성관이나 나주향교, 목사내아 금학헌은 모두 전통 건축양식이다. 이곳 방문은 각박한 삶을 잠시 내려놓고 옛 선조들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곡선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금성관 일대는 알고 보면 나주에서도 ‘문화유산의 보고’ 같은 공간이다. 제대로 둘러보려면 짧게 잡아도 하루는 거뜬이 소요될 성 싶다. 심심하지 않은 하루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답사를 하다보니 오후 3시를 훌쩍 넘겼다. 금성관 건너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했다. 그 시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출출한 배를 달래고 있었다. 곰탕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마치 스님의 공양그릇처럼 말이다. 식당을 나섰을 때 우중충하고 비가 내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개어 있었다. 햇빛이 비온 뒤 젖은 하늘을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