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수많은 이들에게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유채꽃으로 뒤덮인 들판과 신선한 숲, 풍성하고 입맛 돋우는 먹거리, 고즈넉한 바다와 해안길을 떠올리게 되는 제주는 여행, 휴식, 힐링,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주에서 나고 자랐거나 떠나온 많은 이들에겐 한과 아픔이 응어리진 땅이기도 하다.

그곳에 자리잡고 앉은 흙과 돌, 푸른 물에는 피와 눈물, 처참하게 찢긴 삶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언론재단 광주지사가 마련한 ‘기억의 복원 70년 제주4·3’ 현장연수를 다녀왔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으로 진행된 이번 연수에는 필자를 비롯해 광주와 전남, 전북, 부산과 경남, 경북 등 10개 지역 신문사 기자 17명이 참여해 ‘제주 4·3’ 현장을 둘러봤다. ‘다크 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같이 역사적 비극이 일어난 곳이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재난 및 재해 현장을 돌아보면서 희생된 자들의 넋을 기리고 교훈을 얻는 것을 일컫는다.

국내 대표적인 곳 중 한 곳이 올해 70주년을 맞는 제주 4·3사건 현장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제주 4·3’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실상은 제주 전역에서 무고한 양민 3만 여명의 대다수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만명 가량이었으니 10분의 1이 희생당한 것으로 ‘현대사의 비극’이다. 170여개 마을(리) 중 희생자가 없는 마을이 없었고, 제주 전역은 피로 젖은, 원혼이 떠도는 땅이 됐다.

4·3 희생자 분포지도를 보면 유독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 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로 알려진 제주 북촌리는 1949년 1월17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2연대 3대대의 학살극으로 하루동안 북촌초등학교와 인근 밭 등에서 200여명이 넘는 주민이 학살된 곳이다. 학살극이 벌어진 이튿날 인근 함덕리 소개된 주민들은 또다시 ‘도피자 가족’이거나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처형됐다. 이틀 동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0여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만난 고완순(79) 북촌리 노인회장으로부터 들은 증언은 비극 그 자체였다.

당시 9살 평범한 소녀였던 고 회장은 “북촌초등학교에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몇 명씩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는데 어김없이 총소리가 들렸지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 우리 차례가 왔어요. 옴팡밭에 끌려가 엄마와 언니 손을 꽉 잡은 채 앞만 보고 있었어요. 이미 우리 앞엔 죽어서 널브러진 시신들이 즐비했지요. 늦은 오후였는데 구름 속에 들어갔던 해가 잠깐씩 나올 때마다 피가 엉겨붙어 시커멓게 된 흙바닥이 반짝거리던 게 지금도 생각나요. 뒤에선 총알을 장전하는지 계속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프차가 나타나더니 ‘사격중지’ 하더라고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 회장은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집도, 마을도, 이웃도 사라진 뒤였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피바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거세졌다. 일명 ‘예비검속’. 입산자의 가족이나 요시찰자로 분류된 이들은 대대적으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인근 섯알오름은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으로, 군에 의해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유족들은 6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섯알오름 인근의 ‘백조일손지지’는 이 중 132구의 시신을 안장한 묘역이다. 조상은 100여명이지만 자손들은 한 형제들처럼 지내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4·3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공권력이 수많은 양민을 집단학살한 우리 현대사의 아픈 흔적이다.

이런 제주 4·3사건과 함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여순사건’(여수·순천 사건)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발한 봉기로 촉발했다. 지역주민이 지지하고 합세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했고, 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곡성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 1만5000명~2만여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았다. 또한 유족은 물론 지역민까지 연좌제로 인한 피해도 상당했다.

하지만 제주 4·3사건과 함께 올해 70주년을 맞는 여순사건은 지금까지 사건의 성격과 진실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특별법 제정으로 기념사업이라도 진행 중인 제주 4·3과 함께 여순사건 역시 재조명돼 어두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