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영화 1987 속 ‘연희’가 묻는다.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이들을 향한 반문이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연희처럼 물었을 게다. 권력은 비대했고, 보통 사람들의 삶은 그만큼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움직였다. 그 작은 힘들은 결국 권력을 넘어섰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낸, 1987년 6월의 일이다.

그해로부터 30여년이 흘러, 6월 항쟁은 영화로 기록됐다. 그 중심에는 ‘1987’을 집필한 김경찬 작가가 있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딱 한마디의 질문이었다. “왜 6월 항쟁은 영화로 안 만드는 거야?” 곧장 집필이 시작됐다. 초고를 잡는데 까지 3주가 채 안 걸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하고픈 메시지가 정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작가는 그 시절의 ‘보통사람들’에 주목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무자비한 폭압 앞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았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민초들의 혁명은 세 번 일어납니다. 4·19혁명, 87년 6월 그리고 이번 촛불혁명까지. 민초들이 스스로 일어나,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린 일이죠. 보통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면 권력은 결국 무릎을 꿇었음을 영화를 통해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나 키워낸 것은 바로 ‘보통사람들’임을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김 작가는 극 중 ‘연희’란 캐릭터에 애착이 간다. 연희는 한껏 멋을 내고 미팅에 나가다, 우연히 시위행렬에 휩쓸리 게 된 여대생이다. 그는 연희는 곧 그 시절의 자신이라 고백한다.

“그해 6월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전남대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전남대에서 시위하던 대학생 선배들이 우리학교 운동장으로 도망쳐 왔어요. 전경들이 쫓아와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끌고 가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봤죠. 1980년 5월의 진실은 전남대에 입학해 선배들이 보여주는 비디오로 접했습니다. 머리가 빡! 하고 깨지는 기분이었어요. 영화 속 연희처럼요.”

김경찬 작가는 “30년 전의 화염병이나 2년 전 전국을 밝힌 촛불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며 “영화가 6월 항쟁과 촛불세대를 잇는 든든한 다리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그이지만, 대학 시절 소위 말해 치열한 ‘운동권’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늘 올곧게 사회를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는 제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언론인이었다.

목포MBC에서 제작 PD로 활동하다, 2008년 겨울 그만뒀다. 이유는 “방송으로는 더 이상 하고픈 이야길 할 수 없겠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였고, 김재철이 MBC 사장에 취임한 지 1년째 되는 해였다.

상경해서 독립PD로 일을 했다. 짬짬이 글을 썼는데,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제작된 것이 대형마트 해고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데뷔작 ‘카트’(2014)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써봐야겠다 시작해 글을 썼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1987’이다.

그가 이번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고민한 부분은 바로 ‘보통사람들’을 어떻게 주인공으로 만드느냐 였다. ‘100만 군중’으로 표현된 이들의 힘을 스토리로 녹여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사실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30여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고 나가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다.

김 작가는 특정인물이 아닌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 전개 방식을 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의 죽음까지.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을 매개로, 그 시절을 견뎌냈던 사람들의 삶이 실타래처럼 엮여 나온다. 박종철 군 시신 부검을 밀어붙였던 공안부장, 양심적으로 진술한 의사, 대의를 위해 힘을 보탰던 교도관 등이 릴레이로 나오는 식이다.

이 같은 구성은 상업영화에서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6월 항쟁’의 주제의식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선 필연이었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다.

“6월 항쟁 자체가 시대의 영웅이 나타나 전개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 한 인물에 초점을 두면 역사적 팩트가 깨질 위험이 있어요. 그렇다고 모두를 다룬다면 영화가 아닌, 대하드라마가 될 테고요. 때문에 각자의 인물들이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이행하고 빠지는 형태로 짰어요.”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는 수없는 갈등과 고민이 뒤따랐다.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만한 지점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래도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다.

“공안부장 역을 맡은 하정우 캐릭터가 멋지니,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자는 의견이나, 교도관 유해진의 이야기를 풀어내자는 제안들이 있었죠. 사실 ‘선과 악’의 대결로 간다면 영화는 쉬워져요. 그렇게 방향을 틀었다면 지금의 영화와는 많이 달라졌겠죠.”

‘1987’ 한 장면

초안대로 쭉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데는 좋은 배우들이 뜻을 함께 해준 덕이다. 생소한 이야기 구조가 관객에게 통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다.

김 작가는 특히 박종철 군 삼촌 역을 맡은 조우진씨의 연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다. 그는 아주 슬픈 얼굴로 딱 세 장면 출연하는데, 그의 깊은 속울음을 관객들도 가슴으로 느꼈을 터다.

“저녁에 본 촬영이 시작됐죠. 하지만 조우진씨는 아침부터 울고 있었어요. 가족을 잃은 그 슬픔이 잠깐의 감정 몰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겠다 싶어서였대요. 화면에서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억울함, 슬픔, 분노 온갖 감정이 담겼어요.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가 모여 ‘1987’을 만든 셈입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제1원칙은 ‘유족들이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였다. 유족들과 끝없이 소통했고, 작은 것이라도 여쭈어 진행했다. 그랬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가 관객 700만을 향해 간다는 소식 보다 더 값진 일이다.

그의 차기작은 올해 12월 개봉예정인 ‘뺑반’으로 정해졌다. 워낙 ‘다작’을 하는 스타일이라 그 이후 일은 알 수 없다. 다만 1945년 그리고 1950년을 배경으로 한 역사극 2편이 곧 빛을 볼 예정이다. 어떤 이야기인가 물으니, 두 역사극 모두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마주한 시대를 다뤘다고 설명한다.

“1945년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죠. 작품은 온전히 새로운 세상에 내던져진 민초들의 삶을 그립니다. 1945년 작품은 일본제국주의란 부도덕한 권력이 빠지고 아노미 상태가 된 사회를 담아낼 예정이에요. 1950년 작품은 이미 다 썼고, 어떤 감독님과 작업할지 조율 중입니다. 전쟁 상황에서 국민들의 고달픈 삶,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케어 해야 하는지. 이에 대한 화두를 던져볼 작정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그의 시선은 늘 민초들을 응시하고 있음이 읽혀진다.

‘1987’ 한 장면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1987’이 전 세대를 통(通)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역할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대한민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하다 보니, 세대 간 살았던 시대가 참 많이 달라요. 1987년 그 시절의 청년들은 시위를 하기 위해 화염병과 돌을 만들었는데, 2016년에는 어땠나요? 양초와 종이컵을 준비했죠. 이러한 차이들이 세대 간 갈등의 골을 만드는 것 같아요. 하지만 화염병과 촛불의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30년 전 시위행렬에 몸을 던졌던 사람들이나, 이후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 사람들이나 그 마음의 크기는 같거든요. 1987이란 영화가 6월 항쟁세대와 촛불세대를 잇는 든든한 다리가 됐으면 합니다.”

한편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은 1987년 1월 스물두 살 박종철씨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끝에 숨진 사건을 시작으로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모두가 주인공인 독특한 전개 방식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해 울림을 전하고 있다. 25일 현재 누적 관객수는 680만 616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