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과 근대의 역사는 대게 서양인의 시각에서 출발하고 평가·정립되는 경우가 주류를 이뤘다. 동양인의 사상체계와 유색인의 문명 성과에 대해 불과 수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사 주류의 밖에 있었던 것도 일반적 인식이었다. 서구 중심적 사고와 예술 행위가 근·현대기를 거치며 동양적 입장과 시각으로 새롭게 확대·자각하면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문화와 예술에도 시선이 집중되었다. 물론 현대에 와서 동양인의 의식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창작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로 파고 들어 가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은 그 연륜이 짧고 국내 제도교육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도 일제치하의 도제교육 시각으로 유입돼 그 본질과 가치의 실현이 일부 한계에 부딪히거나 더딘 감도 없지 않았다.

한국인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씨(49)가 신년 벽두부터 지구촌 미술계 안팎에 화제를 낳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미국 LA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LA아트쇼’ 특별전에 참가한 그는 또 한번 국내외 언론과 미술계의 호평을 받고 있다. 세계 18개국 100여개 갤러리를 통해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현대미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보인 컨템포러리 아트쇼에서 한국작가로서 당당히 주목받는 성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이이남은 작품 ‘만화 병풍(Cartoon Folding Screen) LED TV’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동양의 고전회화를 차용,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을 동양적 시각과 만화적 요소를 통해 해석하는 독창적 아이디어와 기법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동안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이이남과 같은 40대의 젊은 한국의 작가가 최첨단의 현대미술 아트쇼에서 자신의 아이디어와 현대의 기술을 조합한 작품으로 서구중심의 현대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이미 백남준의 계보를 잇는 한국의 영상미디어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광주비엔날레 등 국제현대미술에 잇따라 초대되면서 이제는 국제적 미디어아티스트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12월 1일 광주빛고을문화관에서 한해를 갈무리하는 의미 있는 공연행사가 마련됐었다. ‘미디어창의도시 기념 공연’으로 이 역시 이이남씨가 총감독을 맡아 장르와 공간을 뛰어넘는 입체적인 예술퍼포먼스를 구성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이남의 미디어아트는 물론 현대무용과 발레, 국악, 난타 북춤, 홀로그램, 레이저 등 현대예술의 최신 진화의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기획으로 손색없었다는 평가를 낳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이이남’이란 탁월한 기획력과 아이디어를 가진 예술가가 광주에 있어서 가능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예술가 ‘이이남’은 이제 한 개인을 넘어 문화도시 광주의 자원이고 자산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광주는 예술의 고장임을 자처해왔다.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각종 공모전과 경연대회가 연중 열려 타 지역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광주비엔날레·광주디자인비엔날레, 문화전당에서 마련한 국제전시회와 공연이 ‘문화수도’의 외양을 뒷받침한다. 명실공히 광주가 ‘문화중심도시’·‘문화수도’로서 면모를 갖추려면 이이남과 같은 ‘국제적 스타급 작가’ 발굴의 산실임은 물론 예술가들의 천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인재들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지원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척박하다 못해 씨가 마르고 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조성한다고 정부가 국책사업을 이끌고 있고 시민들은 ‘문화수도 광주’를 자연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면 공허하다. 충장로에 나가 10대 청소년에게, 대학캠퍼스에 가서 20대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여러분은 시인·소설가·무용가·음악가·화가·조각가·디자이너·연극배우·발레리나·소리꾼·국악인 등 예술가를 꿈꾸느냐?”고 말이다. “그렇다”는 답이 얼마나 될까? 예향·문화수도라면 열에 한 둘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장미빛 미래 청사진을 펼쳐야할 테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가 아닌가 싶다. 광주의 한 대학은 올해부터 무용전공이 폐과됐다. 한 때 지역문단과 한국문학 인재의 산실이었던 각 대학의 문예창작과는 신입생 고갈로 인해 사실상 폐과되거나 문 닫을 위기에 있다. 잘 나가던 미술이나 음악전공도 뷰티미용이나 실용음악 쪽으로 학과가 재편되는 양상이 나타날 정도이다.

필자는 과거 10여년 동안 대학 강의를 하며 예술전공 학생들에게 “문화전당은 앞으로 여러분들의 일터이니 열심히 공부하라”, “석사·박사·해외연수나 유학을 통해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고 강조했었다. 실제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과 유학·연수를 가기도 했다. 동료 언론인들도 문화예술 관련 전공을 선택, 석·박사학위 과정에 입문하는 등 문화수도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준비해 왔었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 벽에 막혀 있다.

그래서 지금은 정부와 자치단체가 문화예술인재 발굴·지원에 정책을 집중해 예술인재들의 성장에 숨통을 터주어야할 때이다. ‘제2의 이이남’을 키워내고 문화전당으로부터 혈관을 뚫어 준비된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6월 지방선거에 나서는 단체장들의 공약에도 문화예술인재 키우기에 대한 분명한 정책공약이 있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문화예술’에 대한 비전제시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