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노래는 태초부터 한 몸이었는지 모른다. 시가 가진 아름다운 리듬감과 장단, 행마다 훅 뱉어 내는 들숨과 또 날숨의 하모니가 그 또렷한 증거겠다. 운율감과 말 그대로 ‘시’적인 표현들은 차마 텍스트로만 남기엔, 강렬한 힘을 가졌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中)



그러니 기어코, 시는 노래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수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 시켰을 테고, 글은 끝없이 새로운 선율을 입는다. 시가 곧 노래고, 노래가 곧 시인 이유다.

신경림, 함민복, 안도현,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 등 쟁쟁한 시인들의 작품이 아름다운 하모니가 돼 흘렀다. 분명 귀로 읽는 시인데, 오감을 자극한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연주는 눈길을 사로잡고, 주옥같은 글귀들은 진한 여운을 가슴에 남긴다. 30여년 음악인 그리고 문학인들이 함께 해 온 잔치 ‘포엠콘서트’에서다.

오랜 시간 ‘포엠콘서트’ 현장을 지켰던 오영묵씨는 “포엠콘서트는 ‘시’라는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예술로 뱉어내는 장”이라고 표현했다. 아니, 정확히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시를 읽고 나서 자기적인 예술 장르로 똥을 싸는 것”이라고 했다. 표현이 조금 뭣 하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다.

“포엠콘서트는 인문학 공연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 회 시인 한 명을 선정해서 시 작품을 쭉 읽어오는 거에요. 그리고 음악이면 노래로, 미술이면 그림으로, 또 영화인들은 한 편 영화로 선보이는 것이죠. 다양한 예술가들이 시인의 시를 섭취하고 자기의 예술로 똥을 싸는 겁니다.”

예술인들은 훌륭한 예술재료가 걸게 차려지니 작업할 맛이 나 좋고, 시인들 또한 다양하게 변형된 텍스트를 마주할 수 있어 좋다. ‘포엠콘서트’에 초대된 한 시인은 이를 ‘제2의 등단과 다름 아니다’고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고재종, 이정록, 박남준, 나희덕, 장석남, 김준태, 안도현, 정호승, 천양희, 최영철, 신경림, 이시영, 정희성, 김용택, 이성복, 도종환, 나종영 등 한국 시문학계 대표 작품들이 시가 되고 노래가 돼 흘렀다. 이와 함께 고인이 된 김남주, 김현승, 조태일, 박용철은 물론 광주지역의 오월시도 선율을 입었다.

태초 하나였던 ‘시’와 ‘노래’가 다시 한 몸이 됐다. 광주에서는 어느 곳 보다 빨리 시노래운동이 시작됐다. 1987년 일찍이 지역 대표 음악그룹 ‘꼬두메’가 시적 감성을 더 한 창작곡으로 시노래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안도현시인과 함께한 포엠콘서트, 관객시낭송 모습

1999년에는 본격적인 시노래운동 모임인 ‘시 하나 노래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단체의 모토 또한 시처럼 멋스럽다. ‘노래는 시를 닮아야 하고 시는 노래로 불려 져야 한다’가 그것이다.

“당시 목포에서 교편을 잡던 유종화 시인이 꼬두메에게 제안을 했어요. 그때부터 시에 노래를 입히기 시작했죠. 시 자체적인 운율에다, 선율이 더해지니 더 큰 파괴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요. 더 큰 설득력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요.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더 친근하게 시를 향유 할 수 있었죠.”

처음 ‘시 하나 노래하나’에서는 전국 팔도의 시인들의 작품에 멜로디를 입히는 데 주력했다. 전라도를 비롯해 강원·충청·경상 등 전국 15명의 시인들의 작품이 시노래로 탄생, 카세트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시노래의 특징을 꼽자면 노랫말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점이다. 음악인들은 아름다운 싯구가 멜로디에 묻히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자연스럽게 시를 낭송하는 것처럼 운율감을 살렸고, 노랫말에 담긴 뜻을 오롯이 청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작품을 탐독했다.

“말하자면, 노래로서 시를 다시 읽는 겁니다. 시인들이 음절마다 응축해 녹여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어서 멜로디로 풀어내는 것이죠. 책 속에 인쇄된 정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살아있는 콘텐츠로서 시를 ‘새로’ 또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죠.”

그렇게 문화운동처럼 시작된 것이 2003년 ‘시인들과 함께하는 포엠콘서트’란 정기공연으로 꽃을 피웠다. 꼬두메부터 ‘시하나 노래하나’ 그리고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 등 시노래의 가능성을 내다봤던 지역 예술인들이 걸어온 귀한 걸음들이다.

포엠콘서트는 매월 색다른 시노래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이전의 활동들이 시와 노래 그러니까 텍스트와 선율의 만남이었다면, 회차를 거듭할수록 시노래는 또 하나의 공연예술로 자리 잡아갔다.

012~025 2007년 광주김치축제에서 선보인 포엠콘서트

당시 공연장에서는 생소했던 ‘파워포인트’가 등장해 보는 재미를 더했고, 시적 스토리를 그려내는 샌드애니메이션 아트도 선보여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탄탄한 스토리에 힘입어 시는 다양한 예술로 새 생명을 얻었다. 무용·연극·마임·판소리·미디어아트는 물론 낭독극으로도 변신했다. 오영묵씨가 말한 “다양한 예술 장르로 똥을 싸는 것”이란 말이 더 없이 적확하다.

신경림 작가가 초청됐을 때는 문학인만 200여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거장의 작품들은 20~30대 뮤지션들이 맡아 곡을 붙였다. 다채로운 음악 색을 선보이고자 한 실험적 시도였다. 그의 따뜻한 글 감성이 ‘락’(Rock) 음악으로 승화되자 생소했던지 신 작가는 “음악이 조금…”하고 말을 아꼈다 한다.

“포엠콘서트가 오랜 시간 사랑을 받으니, 시인들 사이에서도 초청된 것을 귀한 기회로 여겨주셨습니다. 자신이 오래전 발표한 시 작품까지 살아있는 콘텐츠가 돼서 돌아다니니 기뻤던 거죠. 또 주류 문인들 뿐 아니라 전국 각 지역의 토박이 시인들을 만나는 콘서트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2007년부터 ‘간이역시노래콘서트’를 열었다. 지역 문인들과의 스킨십을 위해 전국 간이역을 찾아다녔다. 전라도부터 강원도 철원에까지, 간이역에 판을 깔고 지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재조명, 노래했다.

012~025 2007년 광주김치축제에서 선보인 포엠콘서트

그렇게 시는 노래로 불렸다. 그 세월이 30여년이다. 그간 시인들과 협업해 만든 음반이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오씨와 함께 시노래운동을 이끌었던 한보리씨가 만든 개인 작품만 해도 3000곡이 넘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곳곳에서 그 흔적들이 빛을 보고 있는 것.

오씨는 이제 이 같은 결실들을 한자리에 모아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바로 ‘시노래연구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시노래운동의 첫 싹이 움튼 곳이 바로 광주입니다. 지금껏 예술인들이 함께 작업해 온 결과물들을 보여주는 ‘시노래연구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시노래의 메카 같은 곳이죠. 전국에서 시노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페스티벌도 열고, 정기적인 공연도 펼치고요. 결국 시와 노래는 인문학이거든요. 다채로운 예술이 인문학을 만났을 때의 힘, 그 마술 같은 이야기들이 오래 오래 회자 되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2007년 6월 도종환시인의 포엠콘서트 ‘부드러운 속도’ 공연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