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출신 젊은 서양화가 엄기준은 광주와 중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을 펼친다. 그를 보면 중국미술이 우리에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알게 해줄 뿐 아니라 중국미술과 결합할 때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기준 작가는 북경 송좡의 정성준 작가와 오버랩된다. 서로 미술적 성장은 차이가 있으나 공통분모로 북경창작센터가 자리한다.

엄 작가는 2016년 북경창작센터 입주작가를 거치면서 사실상 중국미술 진출의 계기를 맞는다. 화단의 여러 선배들이 그렇게 해서 중국미술시장에서 점점 보폭과 지형을 넓혔듯 이들 젊은 작가 역시 그런 수순을 밟을 공산이 크다. 엄 작가는 2015년 5월2일부터 6월30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 입주작가를 지냈던 하얼빈 출신 기획자 지아 징징(36·Jia Jingjing·기획그룹 야크 YARC 대표)과 올해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북경에 정주공간을 마련, 중국미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중국에 아직은 깊게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지만 향후 깊게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광주에서 엄 작가의 모습 보기가 어려워질 지도 모를 일이다. 당분간 엄 작가의 광주와 북경 두 집 살림살이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엄 작가를 자신의 제7회 개인전(10월2∼21일 광주신세계갤러리) 현장에서 만나 그간의 작업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상세하게 들어봤다. 먼저 엄 작가는 이전 전시에서는 100% 유화로 작업하던 작품들을 선보인 반면, 이번 신세계갤러리 전시에는 연필과 스프레이 두 가지 주재료로 작업, 재료의 변화를 가미한 작품들을 선보였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유화와 연필이 주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화는 강력한 무게감이 있기는 하지만 연필로 작업하면 화면에 공기가 가볍게 통하는 느낌이 있다는 설명이다.

‘New City Build-Torso’

전시를 앞두고 그는 현대사나 현대사회에 대한 시각의 문제를 고심했다. 전체를 위한 하나냐, 하나를 위한 전체냐, 혹은 우리 한 사람을 위한 사회냐, 아니면 사회를 위한 한 개인이냐의 문제같은 것들을 깊이있게 고민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전시회 전후 작품들에는 현대사회를 가시적이고도 시각적으로 바라본 시각이 읽혀진다. 작은 점들을 통해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 것 모두 이를 반영한 증거들이다.

이런 그에게 처음부터 평면회화가 다가온 것은 아니다. 원래 그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중고시절 그는 만화를 좋아했다. 대학을 진학해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만화가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 회화적 만화를 그리고 싶은 욕망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류재웅 작가의 강의를 들으면서 서양화가 훨씬 더 재미있게 다가왔고, 비로소 ‘작가의 삶을 이루는 것은 어떨까’와 ‘작가의 길도 재미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만화보다는 회화가 더 강하게 그의 뇌리에 박히는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그때 그가 서양화를 중단했다면 그의 사전에 북경은 없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회화를 해온 것이 북경으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가 북경으로 정착하기 전에 필리핀 비엔날레와 같은 기획전 ‘비바엑스포’를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 작업 경험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집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북경은 그에게 집중적인 작업을 왜 해야 하는가를 알려준 공간이 되고 있다.

“광주가 부산이나 대구 등 국내 다른 광역시보다 미술이 활발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북경은 국내와는 또 다른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북경미술 혹은 미술시장은 굉장히 경쟁이 치열하더군요.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치열하다는 얘기죠. 규모면에서 광주와 북경은 달라요. 전시장 규모도 다르구요. 그래서 북경에 욕심이 났습니다. 북경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망이 일은 이유이기도 하구요.”

아마 북경에 돌아가게 되면 현대사회에 대한 그의 고민들이 더욱 깊어질 것이고, 작업으로도 한층 더 분명하게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대사회’라는 키워드를 매우 좋아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 살아가면서의 느낌을 회화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가 물질문명이나 소비주의가 만연해 있는데 그것의 폐부나 사회현상 등 다양한 담론들을 화면에 투영하면 좋을 듯해요. 그래서 작품으로 사회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New City Build-friends 4’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에 대한 고민들은 그의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다. 이 고민들이 얼마만큼 진정성을 더하느냐에 따라 알차고 풍성한 그의 화면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이 고민들이 화면에 투영되기 위해서는 그가 무수히 많은 점과 같은 일상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것들에 자신의 사유를 통해 재해석해야 한다는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그의 화면의 힘은 갈수록 약화될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들려준 답변은 늘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꾸준히 생각하고, 이것을 작업으로 풀어가는 작가로 인정받는 한편, 그 생각들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간단한 듯 보여도 그리 쉽지 않아서 문제인 ‘자기생각을 자기작업으로 풀어내는 작가’라고 하는 명제를 개인적으로 선호하죠.”

다만 이런 미술적 생각들은 여느 다른 화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건은 작가들마다 자신의 생각을 화폭에 펼쳐내기 위한 집중력이 다르다는 점이다. 엄 작가는 작가로서의 큰 그림을 생각한다. 그래서 작업에 제대로 미쳐볼 생각 또한 가지고 임한다. 그렇기에 광주와 북경을 오가는 강행군 속 작업과 미술적 대내외 활동을 충실하게 펼치는 속내다. 훗날에 대한 꿈도 그려갈 수 있는 자취가 될 것을 믿는다. 그에게 광주와 북경을 오가는 게 지치는 일이 아니냐고 물었다.

“제게는 광주와 북경을 오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히려 창작에너지가 더 솟구치고 발생하는 듯 해요. 왔다, 갔다 하면 정신도 없고, 쉬이 지칠 것으로 보이겠지만 시시각각 다른 미술과 미술경향, 그리고 미술전반의 흐름을 보면서 직접 체감할 수 있어 다양한 작업 영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작에너지가 더 생기는 것 같아 작업에는 여러모로 긍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작업에 더욱 매진할 생각이에요.”

이처럼 그에게 북경의 기억은 점점 커지고 있고, 앞으로 그에게서 북경을 빼놓고는 언급되지 않을 날이 올 수도 있다. 다만 그도 작업의 질이나 독창적 회화 구축은 두고 두고 싸워나가야 할 명제들임에는 분명하다. 자신만의 작업에 대한 고민이 깊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사실 신세계개인전도 광주에서 열었지만 이 개인전에도 북경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었어요. 그 영향을 떠나 저는 작업의 질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고요. 그리고 중국에는 각양각색의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만의 작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난해 북경창작센터에 있을 때도 저만의 작업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죠.”

엄기준 작가와 그의 아내 지아 징징

마지막으로 한중커플로서 아내(기획자 지아 징징)의 도움이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잊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 이해 폭이 넓어지고 교류 또한 더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고 있어요. 중국에서 예술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내가 있기 때문이죠. 저 혼자하면 수년이 걸릴 텐데 아내 덕분에 2년여만에 자리잡아가는 듯해요. 여기다 미술교육을 전공해 미술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이해도가 높기 때문에 전시에 관한 보조를 포함해 많은 부분들을 아내가 서포터해주는 등 중국에서 제 매니저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보면 될 거에요.”

그는 12월 북경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중국미술시장을 노크할 생각이다. 올들어 중국에서만 네번의 전시에 참여했지만 다가오는 2018년에는 북경에서 더욱 작업에 매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