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 美 소리에 실어…남도 멋 이어갈 것”







‘모태국악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국악을 듣고 쑥쑥 자랐다. 판소리, 민요는 물론, 온갖 국악기가 어우러지는 풍물의 진동까지 고스란히 느꼈을 터. 그랬으니 세상에 나와서는 또 달랐으랴.

어렴풋 기억이 나던 5살 무렵부터는 엄마에게 소리를 배우러 온 언니들의 ‘라이브’를 동요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옆에 앉아 장단을 맞추던 그가 귀여워서 ‘진도아리랑’을 시켜봤는데, 곧 잘 불렀다.

엄마 옆에 서서 쑥스러워 하며 노래를 부르던 그가 지난 10월 25일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열린 ‘제20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대통령상의 주인공으로 자라났다.

호남여성농악 명인 유순자 선생의 피를 물려받아 국악인으로 장성한 양혜인(국립남도국악원 단원)씨 이야기다.

그의 소질을 단번에 알아봐준 것은 역시 그의 어머니이자 스승인 유순자 선생이다.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간 곳은 양씨가 ‘제2의 어머니’라 말하는 이난초 선생 댁이다.

“부모가 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게 어머니의 단호한 철학이셨어요. 그래서 이난초 선생님을 사사하게 됐는데, 스승님이 정말 예뻐해주셨죠. 레슨을 가면 선생님 무릎에 앉아서 목덜미를 껴안고 소리를 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었지만, 아주 어렸을 때 찾아온 첫 제자라서 아껴주신 거죠. 수업을 마치고선, 슈퍼에 가서 사 온 캔 커피를 선생님 손에 쥐어드린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어요. 그렇게 이난초 선생과 귀한 연을 맺게 됐습니다.”

2015년 호남여성농악단 정기발표회에서 어머니 유순자씨와 ‘남도잡가’ 공연을 올린 후 찍은 기념사진.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했고, 또 국악이 좋았던 그다. 소질은 있으나 관심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나 다름없는데, 다행히 전통 국악의 매력을 알아봤다. 매번 듣다 보니 신이 났고, 소리를 내지르다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뭣 모르고 소리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농악에도 관심을 두었다. 유순자 선생이 1년에 두 번 제자들과 함께 합숙을 하면서 농악을 쳤는데, 그 풍물소리에 그만 반해버린 것이다. 소리 말고, 풍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넌 소리를 해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절 안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호남여성농악단 상쇄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딸인 저는 소리를 했으면 하셨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못 다 이룬 꿈을 딸이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죠.”

엄마의 고집이랄까, 같은 국악인으로서 알맞은 길을 찾아주고픈 욕심이랄까. 사실 양혜인씨는 엄마의 구성진 목소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통이 크고, 묵직하고, 또 웅장한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여자이지만 ‘힘’이 강하게 실린 목소리는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에너지를 가졌다. 그가 남성적이고 호탕한 동편제 소리에 강한 이유다.

다섯 살 때부터 소리를 한 그이지만, 진짜 ‘소리 맛을 알았다’고 느낀 때는 고등학교 무렵이다. 엄마의 소리가 귀에 꽂힌 순간부터다. 막연히 소리를 할 때는 엄마의 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는 이렇게 부르는데, 엄마는 다르게 하네?”란 생각과 함께 솔직히 엄마가 소리는 잘 못하는구나라는 평가도 감히 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처음엔 엄마의 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어요. 그런데 커가면서 엄마 소리를 들으니, ‘아 누가 따라할 사람이 없겠다’ 싶은 겁니다. 엄마가 하는 소리가 고제(古制) 소리에요. 말 그대로, 옛날 소리라는 거예요. 현대는 세련된 맛이 있죠. 그런데 옛 소리를 들어보면 꾸밈이 많지 않지만 그 안에 성음이 들어가고, 정갈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데 너무 좋다는 느낌과 동시에 내가 갈 길이 아직 멀구나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일까. 이번 제20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의 대통령상 수상은 그에게 눈물겹도록 감동적이었다. 일반부에 두 번, 명창부에 세 번 총 다섯 번의 도전 끝에 받은 상이어서도 그랬겠지만 무엇보다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유순자 선생이 제7회 대회 때 대상을 받았는데, 마침 대통령상이 없어 국무총리상에 그쳤었다 한다. 이번에 딸인 양씨가 20회 대통령상을 거머쥐었으니, 엄마의 한도 함께 풀어드린 셈이다.

“제 이름이 불리는데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엄마 생각이 가장 먼저 났습니다. 처음에 일반부로 도전을 해서 대상을 받았고, 이후에 다시 명창부로 출전, 세 번째 만에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제 꿈이자, 엄마의 꿈을 이루고 싶어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도전했던 끝에 이룬 결실이었죠.”

웃으며 말하는 그이지만, 소리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는 왜 없었을까. 특히 온 몸으로 발성하는 그에게 체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소리는 ‘체력싸움이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른 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친구들은 외모도 가꾸고 다이어트도 열심이지만 그는 조금 다르다.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대신, 뱃심을 기르고 꾸준한 관리로 짱짱한 체력을 유지한다. 내지르는 힘을 받쳐주어야만 강하고 호탕한 소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 강제적이지만, 다이어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없어 다행인가 싶다”고 웃는 그다.

그에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앞으로 숙제가 너무 많다 한다. 우선 민요 부문에서 큰 산을 넘었으니, 이제 판소리가 남아있다. 바로 도전하기엔 조금 이른 것 같아, 시간을 두고서 차분히 준비해 나갈 생각이다.

‘제20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축하 공연을 하고 있는 양혜인씨.

“우선은 소리발표회를 열어서 무대 경험을 쌓아갈 계획이에요. 무대 위에서 듣는 자신의 소리는 또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우선 남도민요로 영광을 얻었으니, 남도잡가를 모아서 발표회를 준비해볼까, 스승님과 상의중이예요. 내년 하반기부터나 내후년쯤에는 판소리로 또 한 번의 도전을 펼칠 겁니다.”

그가 가고자 하는 소리의 길은 명확하다. 바로 청중에게 소리의 ‘이면’을 들려주는 일이다. 양씨가 생각하는 소리의 이면이라 함은, 자신이 소리 안에 꾹꾹 눌러 담아낸 메시지를 관객이 알아채는 일이다. 같이 공감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감동을 전해주는 것. 그런 소리꾼이 되는 게 꿈이다.

“특히 우리 남도의 소리는 정말 어렵습니다.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고, 배울 것 투성이에요. 남도 특유의 맛과 멋, 한 같은 것들을 표현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남도 소리를 오롯이 전하기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제 안에서 열심히 다져지고 있어요.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들을 몸에 흡수시키고, 그대로 뱉어내는 것. 세상만물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매개하는 일이 이 시대 소리꾼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제20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축하 공연을 하고 있는 양혜인씨.

젊은 소리꾼인 그가 꼽는 또 하나의 과제는 역시 국악의 대중화다. 우리나라 판소리나 민요·풍물 등 전통국악이 사실 외국에서 더 많이 박수를 받는 것이 조금 서운한 그다. 남도 소리의 성지인 호남에서조차 판소리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오늘날 현실이기도 하다.

선배 국악인들의 길을 따라, 미래의 판소리를 책임져야 하는 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도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써 온 국악인들이 많지만, 사실상 마니아층만 형성돼 있습니다. 대부분 국악을 지루하고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판소리는 그 소리가 빚어지기까지, 고통과 역경의 결정체입니다. 소리를 지르는, 순간 뿐 아니라 그 과정들을 어여삐 봐주시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같은 대목을 들어도 느껴지는 감정이 다를 거예요. 우리 음악이니까,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시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물론 저도 공감할 수 있는 소리, 절로 박수가 쏟아질 수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소리꾼이 되기 위해 더욱 정진할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