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부터 손에 흙을 만지기 시작해 지난 35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중진 도예작가 박노연(55·전남 보성군 벌교읍)씨는 이제 ‘달항아리 작가’로 불린다. 1982년 국립도자기 시험소에 들어가 10여년을 배우고 나서 1992년 귀소하듯 탯자리에 돌아와 이을도방을 차리고 전업 도예가의 길을 내딛었다.

보성지역의 ‘덤벙분청’을 되살려 내는 작업 등으로 향토성과 전통성을 기반으로 한 도자기 작업을 해온 그에게 ‘달항아리 작업’은 예술가로서 전환점이나 다름없었다. 수십년 해온 편한 작업을 접고 50대 중반의 나이로 4~5백여년 전 선인들이 일군 ‘백자대호 빚기’의 끊긴 명맥을 되살려 내는 일이 의지와 용기만으로 가능한 작업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일 터.

(사)남도전통문화연구소 한광석(천연염색 명장)소장과 의기투합하여 지난 2015년부터 본격적인 달항아리 작업에 정진해온 박 작가는 이듬해 일종의 시연 작품을 선보여 도예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조선백자대호’와 관련된 자료와 기록, 사진 등을 수집해 분석하고 연구해 21세기의 달항아리 재현을 통해 사라지는 민족문화와 예술의 정수를 보존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과감히 팔을 걷어 붙였다.

초벌굽기 10개 중 겨우 2~3개만 성공하는 험난한 과정을 반복하며 시행착오를 줄여 가는 인내와 집념으로 작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박노연 백자 뱃두리전’에 출품한 달항아리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관심이 이어지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 박 작가는 벌교읍 고향 마을 다랭이논 3개를 합쳐 15년 전에 지은 사발용 장작가마를 일부 개조해 본격적인 달항아리 굽기에 나섰다. 길이 20m, 폭 3m, 높이 1.6m, 경사각 17도의 5칸 가마는 흙과 내화벽돌로 지었다. 대부분의 현대 도예가들이 가스불 가마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박 작가는 전통방식 그대로 땅 위에 흙가마를 짓고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 작품을 굽고 있다.

가마를 손질하는 박노연 작가

달항아리 성형과정은 먼저 백토 흙을 버무려 대형 사발 두 개를 따로 만들어 하루 이틀 정도 건조시킨다. 이어 반원형 사발 두 개를 위 아래로 붙여 물레를 돌리며 형태를 잡아간다. 대개 60cm 정도 높이로 만들어 가마에 넣고 900~1000도의 불로 18~20시간 초벌을 구우면 전체적으로 10%정도 수축된다. 높이가 45~50cm쯤 되는데 이는 사람(작가)의 팔길이 한계와 관련돼 달항아리가 50cm 내외인 이유이다. 초벌에 유약을 발라 가마에 넣고 다시 20시간 동안 구워야 완성품이 세상에 나온다.

청자는 흙에 철분을 함유해 푸른 빛을 띠지만 백자는 흙에 거의 철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흙이 엉겨 붙는 점력이 약해 형태를 잡기 쉽지 않고 굽는 소성 과정도 어렵다. 달항아리가 귀한 이유다. 흙의 철분을 제거하고 불의 온도를 더 높이는 등 성형과 소성, 유약 과정이 당대 최고의 기술력과 경험을 담보한 인간에게 신은 달항아리 탄생을 허락하는 셈이다.

장작가마 봉통굴

박 작가는 지난 11월 14일 네 번째로 장작가마에 불을 댔다. 사발 그릇은 한 번에 수 백개를 동시에 굽지만 달항아리는 한 굴(칸)에 3개씩 4굴에 넣어 고작 12개를 굽는다. 최근 불의 온도 조절 때문에 재벌굽기하며 두번 연속 실패를 맛봤다. 이후 한시도 가마 곁을 떠나지 않고 불의 기운과 분위기, 흐름을 살펴야 했다.

“달항아리는 성형도 무척 고되고 힘들지만 결국 불 때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바람에 따라 굴뚝 배연이 달라 불이 고루 흐르도록 날씨 좋은 날 불을 때야 기물도 잘 나옵니다. 가스 가마와 달리 장작가마는 불 때는 묘미가 있어요. 실제로 장작가마가 고달프고 힘들고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 과정을 더 즐긴다고 할까요. 작업의 방식과 과정은 작가의 고유 몫이지만 장작가마에서 나온 작품이 미학적으로 더 편하고 애착이 갑니다.”

경사도가 심한 사발가마의 온도차를 극복하기 위해 입구부터 크게 확장하고 뜯어 고쳐 불때기의 조절을 통해 불기운의 흐름을 안정되게 할 수 있었다. 보성에서 함께 작업 중인 박익주 도예가의 도움을 받아 변수가 많은 장작가마의 특성을 감지해 경험과 감을 살려 감마의 효율을 높였다고 한다. 장작가마가 유약을 녹이지 못하는 단점 때문에 1320도로 온도를 높였다가 실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1300도의 잔잔한 온도로 낮추는 기술을 유지하는데 집중한다는 것. 장작가마의 온도계는 온도측정보다 온도의 변화를 살펴보는 용도로 날씨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온도조절이 중요한데 이때 작가의 판단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도자기 제작 기법 중 달항아리가 최고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도자 작가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분야지만 거의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옹기처럼 흙타래를 둘둘 말아서 하면 될 것 같지만 철분없는 백토는 점력이 약해 쌓아 올릴 수가 없어 아무나 못하는 거죠. 일부 작가들이 전시회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한 두 작품 만들어 내놓는 경우는 있지만 저처럼 대형 달항아리 작업만 전념하는 작가가 없어 다들 놀랍니다. 달항아리 제작에 전념한 것은 불과 몇년이 안되지만 실제로 지난 30~40년 동안 제작 도자작업을 계속해온 경험과 기술적인 측면이 축적되어 조선시대의 백자대호에 근접한 작품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옻칠 명인’ 이종헌 작가(민족미술인협회장)와 협업한 옻칠 달항아리와 사발 등 칠기 작품도 이번에 함께 공개해 사라지는 달항아리와 옻칠의 재탄생을 알린다.

(사)남도전통문화연구소 주최로 26일 개막, 오는 12월 3일까지 서울시청 지하1층 시민청갤러리에서 박노연 달항아리 대작 50여점을 한꺼번에 국내 미술계에 선보이는 전무후무한 전시회를 연다. ‘뿌리 깊은 나무’ 발행인인 보성 벌교 출신의 한창기 선생 20주기 추모전의 연장선에서 갖는 이 전시회는 ‘불휘 기픈 나무에 걸린 달’·‘새미 기픈 물에 비친 달’을 주제로 기획됐다. 전통 ‘옻칠 명인’ 이종헌 작가(민족미술인협회장)와 협업한 옻칠 달항아리와 사발 등 칠기 작품도 함께 공개해 사라지는 달항아리와 옻칠의 재탄생을 알린다.

“아무리 지금이 좋아도 과거의 작업 경험이 바탕이 된 거지요. 가마의 봉통굴(아궁이) 숯불이 없으면 칸칸이 불이 올라갈 수 없듯이 젊었을 때 고생하며 익힌 수련과정이 있어서 지금 달항아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 동안 힘으로 깡으로 작업했다면 이젠 요령과 경험으로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맥이 끊긴 것을 복원하려고 합니다. 특히 달항아리의 작업과정과 기술을 ‘뿌리 깊은 나무’의 민중자서전처럼 구술로라도 기술해 남기고 싶습니다. 일하기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정말 열심히 해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