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말이 없다. 다만 움직일 뿐. 발레에서 ‘몸’은 언어다. 손끝의 떨림 발끝의 위치, 그리고 시선이 가 닿는 곳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메시지다. 무용수에게 매 순간이 최선이고 그 어떤 움직임도 허투루가 아닌 이유다.

발레의 길로 들어선 후, 진심의 몸짓을 전하려 애썼던 발레리노가 있다. 16살 중학생 시절부터 일찌감치 러시아에서 유학했고, 돌아와서는 서울무용제·전국무용제 무대에서 최고의 무용수로 활약한 발레리노 강태영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교육자의 길로 발을 디뎠다. 그 첫발이 광주예술고등학교다. 일주일에 한 번 광주로 내려와 후배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한다.

지난날 무향 광주의 영광을 잘 안다는 그가, “제2의 무향의 시대를 여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나선 것.

지난 11일 광주예고에서 수업을 막 마치고 돌아온 그를 만났다. 요즘 가르치는데 재미가 들렸다는 그에게서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뿜어지는 기분 좋은 에너지다.



그의 발레인생의 출발점은 ‘전봇대’다. 전봇대에 붙어 바람에 나부끼던 ‘발레 학원’ 전단 한 장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하교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야기다.

“발레 학원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전단이 붙어 있었어요. 어머니가 보시고는 이거다 싶으셨던 거죠. 그 길로 학원으로 가서 등록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원장 선생님께 ‘애가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일주일만 지도해주세요’라고 했어요. 단호한 말투셨는데, 아마 어머니께선 확신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음악에 몸을 맡기고, 동작을 익히는 일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밤 12시에도 새벽 1시에도 방방 뛰어다니면서 날이 새길 기다렸다. 다음날이 돼야 발레 학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게 발레와 찐하게 연을 맺었다. 그 시작을 전봇대의 전단이라 말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능인으로서 아들의 끼를 알아챈 어머니의 눈썰미가 그 단초가 된 셈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본격적으로 발레 전공을 시작했다. 전국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휩쓸었다. 좋아하는 일이, 곧 잘하는 일이 되자 그 인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찍이 ‘인생의 길’을 찾은 그는 더 전문적인 발레 교육을 받기 위해 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중퇴했다. 그리고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발레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아침 클래스를 시작으로 음악·재즈·민속춤 그리고 극장의 역사·운동역학까지 문화예술 전반을 공부했다. 전문 발레인재를 양성하는 최적화된 시스템을 갖춘 곳이나, 아직 어린 소년이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러시아로 가 1년간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했다 하니, 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느꼈을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짐작된다.

“언어도, 문화도 모두 다른 곳에 있으니 힘들었죠. 그때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가족들의 응원이 큰 힘이 돼줬어요. 늘 ‘할 수 있다’고 해줬거든요. 삶이 적응되니, 원래 좋아했던 발레라서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습니다.”

4년 과정을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시기를 ‘방황기’라 말한다. 아킬레스건 부상이 심했던 데다, 고국인 한국에 왔는데 러시아 유학생활의 과정을 인정받지 못할 위기에 빠진 것이다.

“한국 대학에 입학하는 데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졸업장이 무용지물이 됐더라고요. 전문대학 2년 과정으로 인정이 된다고 해 편입을 할 작정이었거든요. 당시에 대학교수님들에게 전화를 해서 자문을 구했어요. 일면식도 없는데 ‘교수님 안녕하세요’부터 시작해서 제 사정을 말씀드렸죠. 모두들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답은 수능을 보고 입학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강씨는 그날로 ‘대학입시’에 매달렸다. 그해 수능이 111일 남은 때였다. 그 시간은 가장 오래 앉아서 연필을 잡아본 시기이기도 하고, 발레를 가장 오래 놓은 때 이기도 하다. 수능을 본 후에는 또 실기 시험에 집중해야 했다. 과정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그는 한양대학교 무용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 입학은 한국 발레계와 그가 연을 맺은 지점이 돼 줬다.

참 열심히 살았구나 싶다. 4년간의 유학생활과 벼락치기와 같던 대입, 그리고 이후 대학공부까지. 무엇이 그렇게 좋았냐 묻자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고 말한다.

강태영씨는 “막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새내기 교사이지만 무용수로서 보고 듣고 느꼈던 많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며 “차세대 발레 주역들을 길러낸다는 책임감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발레는 피지컬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거든요. 모든 근육을 끌어올려서 동작을 만들고, 이어서 순서를 막힘없이 해내야 하죠.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감정 선을 끌고 가야하고요. 그러면서 스스로의 단점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온 몸으로 느끼고 하나하나 극복해가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중에서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몸짓에 담은 ‘감정’이다. 몇 바퀴를 회전하느냐, 얼마나 더 높이 뛰느냐 하는 테크닉 보다, 그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바로 무용수 자신이다. 그가 2009년 서울무용제에서 ‘826번째 외침’으로 연기상을 수상한 것도 이 같은 내공 깊은 표현력 덕이다.

“작품 안에서 제가 어떤 ‘롤’을 부여받았는지, 깊이 고민했죠. 이런 점은 배우랑 비슷해요. 저는 사실 테크닉이 뛰어난 무용수는 아니에요. 하지만 동작을 최대한 깔끔하고 정교하게 완성시키려 노력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듯이 발레도 마찬가지거든요.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진심으로 담아내는 것이죠.”

‘몸짓’으로 모든 걸 말하는 발레에서 남다른 표현력은 가장 큰 무기다. “한 동작 한 동작을 소중히 다룬다”는 그의 몸짓이 무대에서 빛난 순간들이다. 이 같은 그의 철학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중점적으로 지도하고자 하는 것은 춤을 진심으로 추라는 거예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몸짓, 제2의 언어이자 관객과의 매개체죠. 이 같은 몸짓에 감정이 담겨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움직임에 불과하죠. 아마 춤추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겁니다. 가슴으로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닌지요.”

앞으로 계획을 묻자 두 가지 대답이 돌아온다. ‘독창적인 안무가’로 데뷔하는 것과 ‘더 좋은 교육자가 되는 일’이다.

“발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돼있어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움직임·동작에는 한계가 없거든요. 고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동시대와 막힘없이 소통하는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신비로우면서도 독창적인 몸짓을 작품에 승화하는것이죠.”

현장에서 학생들과 대면하다 보니, 자신에게 더 엄격해지는 그다. 더 내실 있게 또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싶은 욕심 탓이다. 그 안에는 차세대 발레 주역들을 길러낸다는 막중한 책임감도 자리하고 있을 터다.

“지금까지는 마냥 좋아서 발레의 길로 쫓아왔다면 이제는 그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아요. 이제 막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새내기 교사이지만 무용수로서 보고 듣고 느꼈던 많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지금의 학생들의 모습에서 불과 10여 년 전 제 모습들이 비춰지거든요. 미래 주역들과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컨템포러리 발레 ‘평범한 남자들’ 공연 모습. 사진제공=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