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뜨거운 1980년대를 보냈던 종교인이 있다. 민주주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지선스님(知詵)이 그 주인공이다. 군부독재 시절 공권력의 무자비한 남용을 목도하고 끔찍한 인권유린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오직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다. 따뜻한 봄바람에 새 희망이 움트는 지난 5월19일 전남 장성 백학봉 아래 산방에서 수행자로서 참선 수행 중인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을 만나 출가에서부터 현재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참불교정신 등에 대해 들어봤다.



스님, 민주주의와 걷다

“37주년 5·18기념일에 주지스님들 200여분과 함께 추모법회를 열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9년만입니다. 그 노래를 목 놓아 부를 수 있게 된 게 말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니 마음이 이제야 놓이네요”

지선스님은 1980~90년대 불교계에서 민주화 운동을 대표해 온 인물이다. 스님과 5·18은 인연이 깊다. 종교계에 있던 스님이 민주주의에 뛰어든 계기가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해 발생한 10·27법란이었다. 당시 지선스님은 스물 셋의 나이에 제주도 관음사 주지이자 최연소 교구장 종횡의원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제주도에 있을 때였는데 광주와 전화연결이 뚝 끊겼어요. 당시 무등산 문빈정사에는 제 은사스님인 석산스님이 계셔서 걱정이 됐죠. 무슨 일인가 해서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물어 들었어요. 광주에 큰 일이 났다고. 얼마 후 광주로 가 그곳에 머무르게 됐는데 사람들이 절에 대고 해코지를 하는 겁니다. 어용불교라느니 전두환 잘되라고 빌어주는 게 종교가 할 짓이라느니…. 화난 시민들에게 모든 불교가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죠. 그렇게 시민들과 만나며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광주의 분위기가 투사로 만들었죠. 그러던 새벽 10·27 법란이 일어난 겁니다.”

10·27법란은 1980년 신군부가 저지른 불교계 탄압사건이다.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신군부 세력은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10월 27일 새벽 4시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곳을 일제히 수색했다. 조계종 스님과 신도 153명은 강제 연행돼 무차별 폭력과 고문을 당했다. 당시 명목은 ‘불교계에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 불순분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에 와서야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권총까지 든 계엄군이 절에 쳐들어와 스님이고 신도고 교구장이고 다 잡아갔어요. 불순분자가 있다면서요. 민주주의가 처참히 밟히는 것을 경험하자 자연스럽게 운동에 나서게 됐지요”

1985년 지선스님은 광주 무등민족문화회 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재야 인사에 이름을 올렸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6·10 민주항쟁운동을 촉발시킨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1987년 6월 10일 성공회 성당 꼭대기에 올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지명에 대한 무효선언 낭독한 이가 지선스님이다.

“10일에 맞춰 낭독하기 위해선 성당에 7일 전에 들어가야 했죠. 성당주변을 지키고 있던 공권력 때문에 담을 뛰어 넘어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종탑 꼭대기에 올라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죠. 낭독을 마치고 성당 옆문으로 나가자 봉고차가 정차돼 있더군요. 그대로 연행돼 동대문 경찰서에 가서 조사받고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로 끌려갔습니다. 가린 눈을 푸니 사방이 빨간색인 방이었어요.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죠. 뒷목이 서늘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더군요. 욕설과 폭력…. 그야말로 짐승취급이었습니다. 제게 내려진 죄목은 내국내란음모죄, 국보법 위반 등 5가지였습니다. 사형이더군요. 그런데 제 목숨은 결국 국민들이 살려줬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약속한 6.29선언이 있던 날, 지선스님은 석방됐다. “석방돼 나오니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씨와 김영삼씨도 있었어요. 그 때 사진이 당시 온갖 신문에 도배 됐더라구요.”

이후 지선스님은 민주화운동 자리마다 함께 했다. 1989년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진상규명 범국민회의 상임공동의장을 맡았고 1990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제2기 공동의장과 광주 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운명같은 승려의 길

지선 스님이 중생의 고통을 위로하고 득도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한 편의 동화 같다. 넉넉지 못한 형편의 집안에서 4남매 중 셋째였던 지선스님은 어리광보다 가난을 먼저 배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됐지만 학비가 없었다. 당시 마을사람들도 빚에 허덕이던 터라 동네 민심에 기댈 수도 없었다. 돈을 쓰며 공부를 하느니 노동자가 돼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지선스님은 다른 두 친구와 함께 밀밭에 모여 무단 가출을 계획했다. 계획은 간단했다. 일단 장성 삼계면사무소에서 만나서 광주로 가자는 것. 들뜬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에 서자 한 버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백양사행이었다.

“순간 마을 할머니와 어머니가 스치듯이 말씀하신 ‘백양사가 좋다더라’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왕 떠나는 길인데 좋다는 백양사 구경이나 하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훌쩍 올라탄 그 버스가 지금의 길까지 저를 인도했네요.”

막상 백양사에 도착하자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분명 처음 왔음에도 예전에 살던 집 마냥 편안했다. 커다란 나무들의 모양새나 중학생 또래로 보이는 친구들이 입고 있던 승복이나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문득 출가를 하고 싶었다. 백양사에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에서 나를 받아줄까 조마조마했는데 재무스님의 승낙서를 받고서야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어린 시절 가출은 출가로 마무리 됐다.

“절에 들어와 생활하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었습니다. 몸은 고달팠어도 왠지 절을 떠날 생각은 안 들더군요. 백양사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나자 은사인 석산 스님께서 ‘지선’이라는 법명을 주셨어요. 법명을 받고서야 집에 출가사실을 알렸습니다. 당시에는 가족들도 놀랐었지만 나중에야 말씀해 주시더군요. 선조 중에 한 분의 묘가 전남 무안의 승달산에 모셔져 있다고요. 승달산은 중 승(僧)에 통달할 달(達)자를 씁니다. 그것 참 묘한 일이지요.”



불교, 시대정신과 호흡해야

지선스님은 종교인의 사회의식을 중요시한다.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불교를 설파하며 정치와 경제, 교육이 못하는 부분엔 종교인들이 나서 경종을 울려야 함을 강조한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우리 스님들은 중생고를 만들어낸 세력에 ‘나는 아니다’고 무관함을 내세워선 안 됩니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생생한 법문만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중생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정권 1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오늘날, 고승에게 고견을 물었다. 지선스님은 문재인 정부에는 ‘국민을 섬길 것’을 제1과제로 주문했다. “우리 국민을 보세요. 위대한 국민입니다. 독립운동부터 시작해서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거치며 단단해졌지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며 성장했어요. 특히 이번 탄핵국면은 국민들이 각성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시간은 우리의 것입니다. 새 정부는 조급성은 뒤로 제쳐두고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국민을 섬기는 길입니다.”

지선스님은 역사발전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사회운동의 유연함을 제안했다. “역사는 선선히 계절이 바뀌듯 옵니다.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따뜻해야 합니다. 인간적이어야 하죠. 말과 글, 행동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반대세력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개혁과 사회운동은 상대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르니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꿀 순 없습니다. 농사는 하루아침에 뚝딱 끝나지 않습니다. 호흡을 길게 갖고 끊임 없이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사회운동도 그렇습니다. 농사가 삶의 일부가 되듯 운동도 그래야 합니다.”



고귀한 기자·사진=최기남 기자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은

△1946년 1월 6일(음)전남 장성군 삼계면 상도리 출생

△1976년 10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 주지

△1987년 5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전국)

△1988년 12월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 의장

△1990년 12월 불교 인권위원회 창립 및 위원

△1993년 7월 전국불교운동연합 상임의장

△1994년 8월 5·18기념재단 이사

△1994년 10월 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 주지

△2000년 8월 조계종 최초 평양 공식방문

△2007년 4월 6월민주항쟁 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2009년 8월 김대중대통령 서거 광주·전남 추모위원장

△2011년 12월 고 김근태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